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중앙방역대책본부에서는 “코로나19 발생 이전의 세상은 이제 다시 오지 않는다”며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라 말했을 정도입니다. 물론, 이는 방역을 생활화하여 이번 같은 사태를 방지하고자 하는 의도이겠죠. 앞으로도 지금처럼 살아야 한다니 좀 답답한 것이 사실이지만 못할 것도 없어 보입니다. 완전히 다른 세상인 지금이 예전의 세상보다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선, 자연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해변 출입이 통제되자 바다거북이 돌아와 알을 낳고, 선박의 입·출항이 줄자 돌고래의 출현이 늘었습니다. 임시 폐쇄된 동물원의 자이언트 판다는 관람객이 사라지자 십년만에 짝짓기를 시작했으며, 아마존과 아프리카에서는 사막화를 부추기는 대규모 벌목이 줄었다고 합니다. 산업 활동 감소로 대기오염이 개선되어 이와 관련한 사망자가 줄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지구를 점령한 인간들의 개발로 내내 파괴되기만 했던 자연이 휴식을 취하면서 회복하고 있는 셈입니다.
다음으로 싸움이 멈추었습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달 24일 “코로나19라는 공동의 적”에 집중해야 할 때라며,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멈출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예멘에서 5년간 11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내전이 2주간 휴전을 맞이했습니다. 필리핀에서도 1969년부터 반세기에 걸쳐 이어지며 4만명의 사망자를 낸 공산 반군과의 내전이 잠시 멈추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카메룬,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콜롬비아 등도 휴전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인류 역사상 누구도 막을 수 없던 전쟁의 포화가 인류 공동의 위기로 부분적으로나마 멈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적정한 거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물리적 거리 두기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함께 살지만, 실상은 따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라는 말 안에 들어가는 구성원은 나와 친인척이거나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사람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살아도 아무런 불편이나 위험이 없었습니다. 되레 저마다의 ‘우리’를 격리하는 것이 자신의 안위를 보전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우리’에게 위기가 닥치자 이전까지 ‘너희’였던 사람들까지 ‘우리’의 범위에 넣기 시작했습니다. 마스크가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 일손이 부족한 지역에 의료진과 봉사자들이 스스로 찾아가며, 저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우리들의 힘겨운 상황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을 다했습니다.
물론 실망스럽고 모자란 부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알 수도 없어 막막한 노릇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완전히 다른 세상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언제쯤 다시 과거로 돌아갈지’를 바라기보다, ‘앞으로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바다거북이 열심히 알을 낳고, 판다가 마음 놓고 교미를 즐기며, 이왕 멈춘 내전을 끝내버리고, 코로나19뿐 아닌 기아와 빈곤, 다른 질병과 고통 앞에 무력하게 소외된 이들까지도 함께 담은 더 큰 ‘우리’를 만들어 살아나갈 방법에 대해서 말입니다.
너무나 허황하여 헛소리처럼 들리는 이야기지만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는 가능하게 느껴지는 것은 저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간 우리가 불가능하다 말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가능하다는 증거를 모두가, 매일 보고 있으니까요.
글∙그림 김보통(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