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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우리는 지구 멸망을 눈치챌 수 있을까요?

등록 2020-02-07 11:37수정 2020-02-07 11:43

김보통의 해 봤습니다

지난 한 주,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만 있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입니다. 사전에 약속을 잡아놓았던 회의 참석을 제외하곤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내딛지 않았습니다. 이때도 집에서 차를 타고 목적지 주차장으로 이동해 최대한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피했습니다. 회의는 오래간만에 새로 준비하는 작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나요?”라는 상대의 질문에 “집에만 있는데, 불편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빈말은 아니었습니다. 원래부터가 밖으로 잘 돌아다니지 않기도 하지만, 무엇이든 배달하면 다음 날 아침에 바로 배송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다만 편리하기는 하나 마음은 복잡한 날들이었습니다.

느지막이 일어나 현관문을 열면 어김없이 식자재가 도착해 있습니다. 새벽부터 배달원이 가져다 놓았겠지요. 감사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몸을 사리고자 집안에만 처박힌 채 다른 이에게 대신 위험을 무릅쓰게 만드는 꼴이었기 때문입니다. 미디어에서는 종일 시시각각으로 늘어나는 확진자의 수와 동선을 알렸습니다. 이동 과정 중에 혹시나 접촉했을 이들에게 정보를 주고 신속한 대응을 하기 위함일 텐데,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이를 토대로 확진자들의 인성과 윤리의식에 대한 말이 쏟아졌습니다. ‘돼지만 살처분 합니까? 정부는 사람도 살처분을 하시오’라는 익명 댓글을 보고는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이 와중에 중국인들의 입국을 금지하는 청원이 60만명 이상의 동의를 받았습니다. 다른 몇 나라에서도 취하는 조치이며 방역을 위한 적극적 대책이라는 것은 인정하나, 지구인들의 인류애란 참으로 깨지기 쉬운 유리잔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와중에 외출을 위한 필수품이 된 마스크 값을 하루 만에 몇배로 올려 파는 상인들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의 안전을 볼모로 잡아 돈을 벌어보겠다는 발상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 속도가 너무나 신속해 마치 오래전부터 이런 날이 오기만을 바라고 있던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한국에서 12년째 살아오다 지난달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던 중국동포는 “조선족 때문에 병이 돈다”는 얘길 들을까 무서워 서둘러 퇴원을 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사스(SARS) 때 이미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어 학습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준비 중이신가요?” 회의 중 본격적인 질문이 나왔습니다.

“세상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 중입니다.” 저는 답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전 세계의 소식을 앉은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고, 수많은 사람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발전하고 있는 것과 별개로 여전히 내 관심사 외의 문제엔 개입하지 않고, 나의 안전을 위해 누군가를 위험으로 내몰며, 발달한 기술을 이용해 내 이득을 취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지금이야말로 멸망의 때일 것입니다. 다만 하늘에서 불덩이가 내려오고, 땅속에서 악마가 나타나거나 하는 대신 너무나 자연스러워 익숙한 모습인 탓에 우리가 멸망의 때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그런 현재 진행형의 세련된 멸망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제 대답에 담당자는 흡족해했으나, 언제나 그렇듯 준비와 실행은 별개의 것이라 정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막히는 차 안에서 3대가 모여 사는 일가족이 생활고 끝에 집단자살했다는 뉴스를 들으며 ‘멸망의 순간을 기록해야지’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글·그림 김보통(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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