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불 삭이는 중인 작은 미미. 작은 미미 제공
마트 계산대 줄이 길다. 아무리 기다려도 줄지 않아서 살펴보니 계산원과 손님이 한창 수다 중이다. “나한테 이 옷 어울릴까? 사이즈는 어때?” “너한테는 이 색 말고 파란색이 어울릴 거 같은데.” “그래? 잠깐만.” 손님은 갑자기 뒤로 돌아 옷을 바꾸러 간다. 저기요? 여기서 10분째 미간에 힘을 주며 당신을 쳐다보고 있는 동양인 여자는 안 보이나요? ‘작고 미미’해서 안 보이나요! 내가 한숨을 쉬자 계산원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양쪽으로 까딱까딱한다. 이런 행동은 인도에선 ‘예스’도 되고 ‘노’도 되고 ‘문제없다’도 되고 ‘나는 모르는 일’도 되는, 그때그때 달라지는 인도인들 특유의 제스처다. 한숨이 나온다.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이곳은 인도 전역에 체인이 있는 대형 마트다.
겨우 내 차례가 되었다. 순조롭게 계산이 진행 중인데, 갑자기 계산원이 ‘라이스페이퍼’를 들어서 신기한 듯 본다. “이건 뭐야? 과자야?” “아니, 물에 불리면 부드럽게 변해. 거기다가 채소를 싸먹는 거지” “신기하네, 나도 집에서 한번 먹어봐야지, 얼마야?” “(어금니 꽉 깨물고) 그건 네가 바코드를 찍으면 알 수 있겠지?” “그나저나 넌 어디에서 왔니? 대만? 싱가포르?” “아니. 한국.” 그게 끝이 아니었다. ‘북한이냐, 남한이냐’에서 시작해서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버뮤다 삼각지대처럼 속절없이 빠지는 수다의 연속. 하아, 열불 터지는 인도!
인도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세탁기가 고장 난 적이 있다. 거품 가득한 채 한참 돌다가 갑자기 작동을 멈춘 세탁기. 기후 때문일까, 인도에서는 유독 물건들 고장이 잦다. 그럴 땐 짜증보다는 큰마음을 먹어야 한다. 긴 여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세탁기 회사에 전화한다. 하지만 연결이 만만치 않다. 빠르고 억양이 강한 인도식 영어를 한 번에 알아듣기도 꽤 어렵다. 겨우 수리 예약을 잡긴 하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진짜 싸움은 그때부터다. 그들은 절대 예약한 시간에 오지 않는다. “왜 안 오냐, 언제 오느냐”라고 전화하면 “트래픽(교통체증) 마담, 트래픽”이라며 끊어 버린다. 결국 지쳐 잠들어 버린다.
다음날 영업시간이 되자마자 전화를 걸지만, 연결이 안 된다. 기사한테 전화하지만 역시 불통이다. “인도 정말 싫어!” 외치며 거품 속에서 썩어가는 빨래를 바라보며 ‘신상’ 라면을 끓여 먹고 잠시 안정을 취한다. 힘을 내 다시 전화하면 다른 기사가 배정된다. 그런데 갑자기 오후 3시쯤 원래 배정받은 기사가 전화한다. 몇 시간 뒤인 밤 7시경에 온단다. 어머, 와준다니 좋긴 한데 말이야, 한국에서 살아온 내가 생각한 매뉴얼은 일단 ’노쇼’에 대한 사과가 먼저다. 인도에서는 “미안하다” 같은 말은 듣기가 참 힘들다. 이쯤 되면 그저 왕림해 주시는 게 감지덕지다.
수리공은 결국 밤 8시께 왔다. 구정물로 바닥을 한강으로 만들며 한참 난리 치던 그가 나를 불렀다. “마담, 이거 부품을 새로 사야 돼.” 나는 무슨 말인가 싶었다. “부품은 당신 같은 기술자들이 가지고 있는 거잖아?” “오늘은 없네. 내가 내일 다시 올게.” 성질 급한 한국인 성질 터지게 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그는 미련 없이 떠났다. 나는 뒤쫓았다. “내일 몇시?” 다급했다. 그는 고개를 양쪽으로 까딱거리며 말했다. “오전? 오후? 언제가 좋아?” “최대한 빨리, 아침!” “오케이” 순간 든 생각은 ‘아침은 아침인데 아침 몇 시에 올 거지?’였다. 그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다시 물었다. “몇 시? 내일 아침 몇 시?” 그러나 그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다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을 잡으면 뭐하겠는가. 어차피 안 지킬 텐데.
그렇게 3일 동안 빨랫감은 썩어들어 갔다. 그때 깨달았다. 열불 터뜨리는 사람이 바보다. 이들의 시간관념은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나라에서 사는 우리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도인들은 1분1초 쪼개 사는 우리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도 불과 200년 전만 해도 지금과는 완전 다른 시간관념으로 살았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시간의 속도는 상대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도에서는 인도의 시간대로, 한국에서는 한국의 시간대로 사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최근 또 열불 터지는 경험을 했다. 식당에서 한 시간이 지나도록 주문한 음식이 나오질 않아 웨이트리스에게 항의했더니 핑계가 신박했다. “네가 주문한 메뉴 만들기가 너무 어려워서 그래.” “어린 양의 고기의 앞다리 비계를 완전히 제거한 뒤 정확하게 2~3㎝로 썰어서 미디엄 레어로 구운 다음, 양파와 자두로 양념한 마살라를 발라 3일 숙성시킨 요리가 아니라 엄연히 메뉴판, 그것도 메뉴판 맨 위에 적혀 있는 마가리타 피자잖아! 만들기 어려우면 애초 메뉴판에 올리지를 말아야지!” 아직도 미스터리다. 그렇다, 인도는 미미 시스터즈만큼이나 미스터리한 나라다.
글·사진 작은미미(미미 시스터즈 멤버·뮤지션·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