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책장에서 낡은 시집 한권을 꺼내 들었습니다. 우리 곁을 떠난 지 30년이 된 기형도 시인에 대한 각종 추모 행사가 계기가 됐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의 첫 장은 뜯어져 너덜거리고, 페이지 가장자리는 환자처럼 누렇게 떴더군요. 시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한 시는 ‘포도밭 묘지·1’입니다.
‘주인은 떠나 없고 여름이 가기도 전에 황폐해버린 그해 가을, 포도밭 등성이로 저녁마다 한 사내의 그림자가 거대한 조명 속에서 잠깐씩 떠오르다 사라지는 풍경 속에서 내 약시의 산책은 비롯되었다’
사내가 저 일리는 없지만, 초판을 발행한 1989년의 저는 ‘황폐’하고, 옅은 바람 앞에도 주춤하고, 조바심에 서성이는 초라한 청춘이었죠. 그런 저는 저녁마다 포도밭을 찾았던 사내가 낯설지 않았어요.
29살에 떠난 그는 여전히 ‘젊음’인 채로 늙어버린 제게 찾아옵니다. 젊은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질투마저 일렁입니다. 삐걱대는 제 몸과 빠지기 시작하는 머리카락, 늘어진 뱃살을 경멸하고 싶은, 부적절(?)한 감정마저 듭니다.
제게 여전히 ‘청춘’인 이는 또 있습니다. 시인 고정희. 1991년 등반 중 실족사한 고 시인의 시집 <아름다운 사람 하나>도 책장 안에서 늙어버렸더군요. 초등학생일 때부터 ‘절친’인 이가 선물한 그 시집 맨 앞 장엔 ‘모든 싸움에서 결국 승리하기를! 92년 가을 OO’이라고 적혀있습니다.(지금 보니 참으로 유치합니다!) 빛나는 젊은 날이 친구의 격려에 담겨 있었지요.
고 시인의 시 ‘사랑법 첫째’을 읽다 보면 여전히 젊게 살고 싶은 제 욕망이 ‘부질없는 기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늙음을 받아들이기엔 마음은 너무 푸른 무청입니다. 하지만 방법이 있더군요. 이번 주 ESC는 ‘근사하게 나이 드는 법’을 소개합니다.
박미향 팀장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