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가까이 사귀고 나서 더 늦기 전에 결혼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 남자는 그랬어. 자긴 자기 인생에서 결혼 같은 걸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그런데 나와 헤어지고 나서 불과 1년 정도 만난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온 거야. 이미 멀어진 사람인데, 슬쩍 배신감이 들더라. 할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그냥 ‘나와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었을까? 내가 그렇게 결혼 상대자로 별로였을까?”
해가 넘어가며 안부나 들으려고 전화했던 친구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나 역시 조금은 다르지만 비슷한 상황을 경험한 것이 떠올랐다. 나와 사귀다 스르륵 헤어졌던 남자가, 나와 사귀기 바로 전에 만났던 사람과 결혼을 했던 일. 나와 만나고 나니 그 전에 만났던 사람이 얼마나 괜찮은 여자인지 깨닫게 되기라도 했던 것일까. 난 그와 결혼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지만 그의 결혼 소식은 나에게도 조금은 비슷한 허탈함을 가져다주었던 기억이 났다.
나와 만났던 사람이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딱히 유쾌할 수만은 없는 일인 걸까. 중요한 사람이었든 그렇지 못한 사람이었든 어쨌든 나는 그의 리스트에서 삭제되었다는 뜻이라서 그런 걸까.
친구와의 통화를 마치고 나니 얼마 전 지인과 연애에 대한 이런저런 수다를 나누다 문득 가슴이 ‘쿡’ 하고 막히는 느낌이 났던 일이 기억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연애는 다 부질없는 사랑 놀음에 불과해. 사랑의 완성은 결혼이고, 사랑의 결실은 아이라니까. 인생은 결혼을 해야 완성되는 거지. 혼자만의 자유? 늙어서도 행복하나 어디 두고 보라니까. 더 늦기 전에 빨리 그러니까 결혼할 남자 만나야지, 안 그래? 연애 그거 다 쓸모없어.”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아옹다옹 사는 삶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고 말하던 그는 완벽한 확신에 차 있었다. 행복으로 이르는 길은 마치 단 한가지밖에 허락되지 않는다는 가족지상주의의 확신 말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그 사람 혼자만의 생각일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길러봐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생각은 기성세대의 아주 오랜 생각이기도 하다. 혼자서 사는 삶은 외롭기 그지없고, 어딘가 부족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의 양식이라는 생각.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이 인간으로 태어나 반드시 이뤄야 하는 목표라도 된다는 듯이. 개인의 행복은, 그것 자체를 추구하기보다 어떤 특정한 시스템 안에 들어갔을 때라야만 실현된다는 것이 이 사회의 오랜 믿음이었던 것도 같다. 물론 낮은 결혼율과 출산율, 그리고 높은 이혼율 등 다양한 지표들이 이 오랜 믿음의 붕괴를 증명하고 있지만.
다시 이야기를 돌려 내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내 친구가 느낀 허탈한 감정은, 단지 나를 아끼던 이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닐 거다. 결혼, 그러니까 이른바 사랑의 완성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했다는 것이 못내 가슴 아픈 것이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 그러니까 이른바 사랑의 결실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 못내 원통했을 것이다. 나와는 안 되던 그 완성이라는 게, 다른 여자와는 된다는 게 섭섭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번은 멈춰서 생각해야 한다. 정말 사랑의 완성이 결혼이고, 사랑의 결실이 아이가 맞나? 그것이 유일한 사랑의 종착지인가? 숱한 사람들이 결혼을 했어도 서로 제대로 사랑하지 못해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입히고 종종 헤어지며,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그 아이에게조차 큰 상처를 준다. 사랑은 어떤 제도에 들어가겠다고 마음먹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아이는 그저 두 사람의 의지에 의해 태어났을 뿐 그걸로 끝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의 완성이 결혼이고, 결실이 아이라는 말은 어쩌면 결혼과 양육의 고단함과 버거움을 잊기 위해 만들어진 달콤한 주문 같은 말이 아닐까. 혼자서 잠드는 밤은 그저 외로울 수 있지만 곁에 누가 있어도 외로운 밤은 괴로움과 외로움이 뒤섞인 밤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만 모른다. 그 어떤 삶의 양식도 감히 사랑을 ‘완성’할 수는 없다는 것도 그저 아는 사람들만이 알 뿐이다. 어떤 사랑은 헤어짐으로 완성되며 또 어떤 사랑은 아픔을 통한 스스로의 성장으로 결실을 맺을 뿐이다. 그러니 내일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 말을 해주어야 할 것 같다.
“절대 안 한다던 결혼을 다른 여자와는 1년 만에 하겠다고 결심한 남자 때문에 상처받지 말길. 어쩌면 그는 네게 비겁한 남자였을지 모르지. 그저 이기적인 남자일지 몰라. 하지만 그렇다면 헤어진 것이 오히려 다행이지 않니? 그는 그저 자신의 인생의 지금 이 시기가 되어 특정한 시스템을 선택한 것일 뿐, 그 선택과 너의 가치는 하등 상관없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의 완성이란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자이든 나를 떠난 자이든 그의 행복과 평안을 빌어주는 마음에 달려 있지 않을까. 그는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났으니, 너는 너대로 그와의 사랑을 이제 그만 완성하렴. 너의 가치를 몰라본 사람에게 마음을 쓰기에, 이 삶이 너무 짧단다.”
곽정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