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곽정은의 '이토록 불편한 사랑'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두고두고 회자되는 영화 <봄날은 간다>의 대사다. 거침없이 서로에게 빠져들었지만 서서히 삐걱거리는 관계, 상우(유지태)는 은수(이영애)에게 슬픔과 분노가 가득한 표정으로 이렇게밖에는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언제까지고 함께하고 싶고, 상대도 나와 같은 마음이길 바랐지만 상대는 나만큼은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그 허탈함이란 여러 번을 겪어도 쉽게 무뎌지지 않는 어떤 것이니까.
지난주에 강연을 하러 갔던 학교에서 한 학생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매번 반년 정도면 연애가 순식간에 끝나 버리는데, 오래갈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질문은 더없이 간단하게 보였지만 누구를 만나도 비슷한 시기, 비슷한 방식으로 헤어졌던 사람의 피로감이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반년, 그 말을 들으니 영화 속 은수와 상우도 겨울에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다음 해 여름이 되어 헤어졌단 게 생각났다. 호감과 호기심이 만들어낸 사랑의 감정이 위기를 맞이하는 건 대단히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계절이 두번 변할 그 언저리에서 우리는 이 관계를 계속할지 말지의 기로에 많이 서게 되는 것 같다. 자신들도 모르게, 일종의 ‘중간평가’를 하게 되는 것이랄까. 시기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이 모두 긍정적 평가를 내리지 않는 이상 관계는 종료의 수순을 밟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째서 내 연애는 늘 6개월 언저리에서 끝나는가’라고 물었던 그는, 늘 그 언저리에서 상대방과 계속 갈지 말지를 가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이라고 그 느낌을 모르지 않는다. 머뭇거리며 뒤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날들에 대해 미적거리는 그 태도는 의외로 읽히기 쉽기 때문이다. 미적거리는 두 사람이, 예전 같지 않을 것은 뻔한 일 아닐까?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상호간 중간평가를 한번쯤 잘 통과했다고 해서 그 관계가 계속 잘될 거라는 보증은 누구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관계를 시작하는 것보다 관계를 지켜나가기가 더 어렵고 버거운 것은 우리들 스스로가 고정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일 거다. 몸, 감정, 생각, 둘러싼 환경들까지.
인지하고 있지 못할 뿐 우리는 매일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중이고 그래서 관계를 지키는 일은 시간이 간다고 해서 더 수월해지기 힘들어지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을 2년간 만나고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 온 전력을 다해 공격하기 바빴고 그래서 무참히 이별을 맞았던 그해에, 나는 인도까지 날아가 명상 지도자를 찾아가 물었다. 왜 우리는 처음의 뜨거운 마음을 잊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바쁜 존재가 되어가는지를. 그는 대답했다.
“누군가에게 처음 사랑에 빠질 때, 우리는 지극히 피상적인 이유들로 그 사람을 선택하게 됩니다. 외모가 멋지거나 배경이나 경제력이 훌륭해서, 혹은 나에게 잘해주기 때문에, 혹은 남들 다 연애하고 결혼하니까 나도 안 하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에 선택을 하죠. 그러나 그게 문제는 아닙니다. 그렇게 만나도 돼요. 다만 두 사람이 만나는 이유가 그것에 고착되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시간이 가면 상대의 외모나 경제력, 나에게 잘해주는 정도, 나의 불안감은 처음과 달라지게 마련이기 때문이죠. 더 조건이 좋은 사람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고요.”
그는 그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동지의식, 존중, 상대방의 행복을 내 행복과 동일하게 존중할 수 있는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애초에 서로에게 빠지게 만든 그 이유들만 생각하며 왜 처음과 같지 않으냐, 왜 처음처럼 나를 아껴주지 않느냐 따져 묻는다 했다. 점점 안정된 사랑으로 변해가기 위해서, 관계가 단단히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처음의 그 이유들’, 두 사람이 함께 탄 첫번째 배를 버리고 더 좋은 배로 함께 갈아타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배에 올라탔다 탈출하는 일을 반복하게 될 뿐이다. 고단한 인생이, 어리석은 사랑 때문에 더 고단해지는 것이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제 그렇게 말한다. 사실 사랑은 변해야 한다고. 상대방에게 귀 기울이고, 마음을 알아주며, 상대방의 독립성을 존중하고, 상대의 행복을 위해 ‘애쓰지 않는 관계’는 당장 내일이라도 끝날 수 있는 무엇일 뿐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다 알고 설명까지 할 수 있다 해서 사랑이 쉽겠나. 십수년 했던 직장생활의 모든 고통을 합친 것보다, 내 마음을 전달하고 사랑을 지켜내는 것이 천만배쯤 힘들다. 그런데 직장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1g도 없지만 이 사랑만큼은 계속 하고 싶은 걸 보면 ‘사랑 참 뭔가’ 싶으며, 그걸 지켜낸다는 건 ‘또 대체 뭔가’ 싶은 것이다. 2017년, 사랑 때문에 힘들었던 누구에게라도 이 글을 통해 한 조각의 위로가 전해지기를. 올해에는, 더 좋은 사랑들을 하시기를.
곽정은 작가
픽사베이
영화 <봄날은 간다>.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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