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관계와 사랑에 대해 글을 쓰고 말하는 직업을 갖고 있다 보니 낯 모르는 사람들에게서도 상담요청 메일이 꽤 많이 도착하곤 한다. 익명을 통해 그렇게 도착하는 사연들의 대부분은 성관계를 둘러싼 갈등과 고민이었다. 산부인과든 비뇨기과든 혹은 성클리닉이든, 전문기관을 찾아가야 하는 사연들이 내게 도착할 때면 어쩐지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되곤 했다.
하지만 그런 당혹스러운 사연들보다 더 당혹스러웠던 건,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조카의 한마디였다. 얼마 전 “너는 학교에서 성교육 잘 받는 편이야? 어때?”라고 물었던 내게 조카가 해준 대답은 이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응, 이 나이쯤 되면 애들 알 거 다 알고, 할 거 다 하는데 성교육 시간엔 정자와 난자가 만난다는 이야기나 하고 있어. 콘돔을 어떻게 사야 하는지 이런 걸 알려줬으면 하는데 제대로 안 알려줘. 그래서 성관계하는 애들은 비닐이나 랩으로도 많이 대체한다고 알고 있어.”
이럴 수가, 나는 아찔하다 못해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성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쉬쉬하고 무조건 억압할 줄만 알았던 어른들은, 이미 알 것 다 알고 할 것 다 하는 10대를 콘돔 하나 쉽게 사지 못해 위험천만한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 셈이다.
삼성서울병원 이동윤 산부인과 교수 연구팀의 실제 설문조사도 이런 증언을 뒷받침한다. 성관계를 할 때 피임을 하는 청소년은 절반 정도에 불과하며, 그중 체외사정이나 자연주기법 등 피임 방법이라고 부를 만하지 않은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도 20%가량이나 된다.
더 참담한 건 어른이 된다고 해서 10대 때보다 나은 피임법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014년을 기준으로 콘돔 사용과 피임약 복용 등 적극적 피임 방법을 사용하는 비율은 44%였던 10년 전과 견줘 반토막이 나 21.1%가 됐다.(‘2004~2014 한국 여성 성생활’, 서울시 보라매병원 발표)
‘설마 임신이 되겠어?’라는 안일한 생각, 콘돔을 사용하면 아무래도 성감이 떨어진다는 선입견 때문에 청소년 시기보다 더 ‘나쁜 피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콘돔을 쉽게 살 수 없어서 그것을 대체할 것을 찾던 10대는, 20대 30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콘돔을 대신할 다른 방법만 찾아다니는 셈이랄까. 성과 관련된 것을 ‘19금’이라는 말로 묶어놓고 무작정 막기만 한 결과, 아이들도 어른들도 불안한 섹스를 선택하는 사회가 되었다. 몇년 전 뉴욕의 한 서점 계산대 위에 수북이 쌓여 있어 누구든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게 돼 있던 콘돔을 보고 적잖이 놀라고 또 한편으로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몸은 소중한 것이니까 잘 지켜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 같은 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런 뻔한 말로는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았고, 않을 테니까. 콘돔을 갖고 다니는 것이 ‘안전한 성관계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증거가 아니라 ‘언제든지 섹스 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밝히는 사람’이라는 증거로 해석되는 위선. 이 지루한 위선 속에서 단 한번이라도 불안한 마음으로 달력을 바라보며 이달의 생리가 시작하기를 고대해본 여자들에게 꼭 건네고 싶은 말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몸의 권리는 자기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고. 내 몸을 꾸밀 때도, 좋아하는 누군가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몸의 대화를 나눌 때에도, 그리고 그 몸의 대화로 인해 벌어진 일들을 감당해야 할 때조차도 말이다.
타인에 의해 재단되고 통제되는 몸이 아니라 내 몸의 느낌과 건강 그리고 안전을 통제하고 책임지는 진짜 주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1인분’의 삶을 살 수 있고, 충만한 사랑을 나눌 가치가 있는 사람을 알아볼 눈이 생기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여자들이, 사실은 별로 내키지 않는데 타의에 의해 성관계를 하고, 너무 많은 여자들이 사실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피임을 하지 않고 섹스를 하며, 너무 많은 여자들이 별로 좋은 것도 모르겠지만 좋은 척하면서 섹스를 한다.
한 번도 자기 몸의 주인이었던 적 없는 여자가 ‘콘돔을 쓰자’는 말을 당당하게 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고, 성감이 떨어지니 콘돔을 쓰고 싶지 않다는 남자를 거부하는 일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남자와, 마음속으로 끙끙 앓으며 고단한 연애를 할 필요가 있을까.
성관계를 하기 직전, “그런데 콘돔은?”이라고 물어보길. 이 질문에 자연스럽지 못한 태도를 가진 모든 남자는 당신의 연애 상대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지금 만나는 남자가 피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 느낌에만 관심을 쏟는 남자라면, 임신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당신이 충분히 긴장을 풀 수 없는데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밀어붙이는 남자라면, 그것이야말로 그 남자를 곁에 더 이상 둘 필요가 없다는 강력한 신호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취급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강력한 증명이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피임이라는 걸 제대로 하지 않는 사회에서, 피임에 대한 입장은 그 사람을 파악하는 꽤나 날카로운 지표가 되어버렸다. 2012년 헌법재판소 헌법소원 심판 결정에 따르면 여성의 자기결정권보다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의 생명권이 앞선다는 판결이 여전히 유효한 땅에서, 낙태를 저지른 여성과 의료인은 처벌을 받아도 남성은 처벌받지 않는 아이러니한 땅에서, ‘괜찮아, 나만 믿어’라고 말하는 남자, 그 남자에게 결별 선언 말고 더 줄 만한 게 있을까?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