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살, 내 둘째 조카는 걸그룹에 관심이 많다. 조카는 ‘트와이스’의 노래를 곧잘 따라 불렀고, 여름 내내 “엄마 저도 테니스 치마가 갖고 싶어요”라고 말하곤 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화려한 스타들을 선망하는 10대의 존재란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나는 어쩐지 조카가 따라 부르는 노래가 맘에 걸리곤 했다.
예쁘고 발랄한 에너지를 온몸으로 뿜어내는 이 매력적인 걸그룹의 노래(‘우아하게’, ‘치얼업’, ‘티티(TT)’ 등) 속에서 점점 더 강화되는 명백한 성평등의 퇴보와 수동성 때문이었다. 처음엔 그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걸 알게 해주는 사람 기다리고 있다’(‘우아하게’)고 고백하던 그녀들은 ‘여자가 쉽게 맘을 주면 안 돼 그래야 니가 날 더 좋아하게 될걸’(‘치얼업’)이라고 외치고, 결국은 ‘맴매매매 아무 죄도 없는 인형만 때찌’(‘티티’)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녀들의 모습은 점점 성숙해 가는데, 그녀들이 하는 말은 점점 어리고 어수룩해 보인다.
그냥 예쁘고 재능 있는 자들의 무대를 즐기면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여럿일 것이다. 그러나 정말 세상이 그렇게 단순한가? 거리의 스피커에서 수도 없이 소비되는 이 가사들은 쉽게 흥얼거려지는 멜로디에 숨어 ‘예쁜 가사’로 인식되고, 누군가의 생각이 되며 그렇게 차차 여성의 태도를 규정하는 명제로서의 역할을 한다. 트와이스가 문제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쩝, 나는 아직까진 그들을 무척 좋아한다.) 다만 오직 사랑받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는 여성의 목소리가 수동성의 색깔을 입은 채 큰 인기를 끌 수 있는 사회에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걸그룹이 고등학생 느낌으로 스타일링을 하고 교복 느낌 가득한 미니스커트가 거리를 휩쓰는 풍경에 의문을 가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섹스 칼럼을 내가 처음 쓴 것이 2003년이다. ‘먼저 호감을 표현하면 저를 쉬운 여자로 보겠죠?’, ‘성관계를 너무 일찍 허락해서 그가 떠난 걸까요?’라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여자들이 2017년에도 넘쳐날 줄, 나는 차마 상상하지 못했다.
평등한 파트너십으로서의 관계를 두려워하는 남자들, 수동적인 여자여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는 여자들이 만들고 경험하는 타인과의 관계란 소모적이거나 비참하거나 혹 그 둘 다이거나다. 관계의 주체가 되기 원한다면 서로에 대한 존중이 핵심이며, 평등에의 욕구를 내려놓는 순간 존중도 물 건너가 버리기 때문일 것이니까. 어수룩하고 수줍고 수동적인 여성상이 이토록 잘 소비되고 전파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비극이다.
‘약한 여자, 사랑에 약한 여자 내게 강요하지 마/ 내 모습 그대로 당당하고 싶어/ 그늘에 갇혀 사는 여자를 기대하진 마/ 난 이 세상을 모두 바꿔버릴 꿈을 다 가진걸.’ 2005년 보아가 발표한 ‘걸스 온 탑’의 가사다. 2005년은, 이런 노래가 발표될 수 있는 해였다. 2017년이었다면, 보아의 이 노래는 나올 수 있었을까? ‘보아’와 ‘트와이스’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곽정은(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