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홍종길 기자 jonggeel@hani.co.kr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홍대입구역 6번 출구 앞이 변했다. 경의중앙선이 지나는 이 거리에 ‘경의선 책거리’가 조성되면서 책 세상으로 변했다. 지난해 10월 마포구청은 책을 소재로 한 테마거리인 ‘경의선 책거리’를 만들어 지역주민의 휴식처이자 관광객의 여행지로 이 지역을 탈바꿈시켰다. 한국출판협동조합이 위탁 운영하는 이 거리에는 현재 산책로와 각종 조형물, 열차칸 모양의 책 부스 등이 들어서 있다. 한국출판협동조합은 더 나아가 여행자를 위한 걷기 좋은 두 가지 코스를 만들었다. 제주올레의 도시 버전이다. 걷다 보면 화려한 네온사인에 파묻혀 지나쳤던 고즈넉한 풍경을 만난다.
A코스 헌책방길: 빛바랜 책이 안내하는 시간여행
지하철 2호선 신촌역 8번 출구 → 숨어있는 책 → 피터캣 → 공씨책방 → 글벗서점 → 지학사 → 김대중도서관과 평화다방 → 러빈허(플로르떼) → 경의선 책거리
신촌역 8번 출구를 빠져나와 골목에 들어서자 푸른 하늘을 메워버린 까만 전선이 보였다. 도시의 뒤통수는 복잡하고 스산하다. 거리는 찌꺼기 추위를 마저 몰아내려는 듯 기세등등한 봄 햇살로 따스했다. 이 뒷골목에 헌책방 ‘숨어있는 책’이 정말 숨어 있었다. 이곳 책 가격은 정가의 20~50%. 들머리에는 정가와 상관없이 1000원에 파는 책들이 쌓여 있었다. 삼성을 다룬 경영서적이 두 권 눈에 띄었다. 들춰 보니 ‘무엇이든 혼자서 하는 걸 좋아했다. 골프도 90% 혼자 친다’는 내용이 나왔다. 혼술의 진정한 원조가 이건희 회장이었네.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수조원 매출의 글로벌 기업에 관한 책이 고작 1000원이라니. 주인 노동환(52)씨는 “인문사회과학, 예술이론서, 종교서가 중심”이라서 최근 경영서는 빼고 있다고 했다.
1999년 연 이 책방은 2010년께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지하 165㎡(50평) 규모의 매장에 책 8만~9만권이 있다. 누런 <문학사상> 등을 꺼내 펼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출간연도가 1973년. 무려 44년 전 나온 책이다. 심지어 1950년대 책도 있었다. 낡은 책의 유혹에 푹 빠져 결국 지갑을 열었다. 두꺼운 책 5권이 3만원을 넘지 않았다.
노씨가 말하는 헌책방의 진짜 매력은 “희귀본이나 증정본 포함 일반 책방에서 구하기 어려운 책이 있다는 점”이다. 지난 5일 이곳에서 만난 이용희(26)씨는 미술사 전공 대학원생으로 “다른 곳에 없는 전공서적이 많아 자주 찾는다”고 했다.
다음 여행지는 북카페 ‘피터캣’. 문을 열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사무실처럼 노트북을 열고 일에 몰두하는 이들이 많았다. 한쪽 벽에는 1000여권의 고전문학책이 꽂혀 있었다. 주인 이한구(46)씨가 모은 책들이다. 패션회사에 다녔던 그는 책이 좋아 직업을 바꿨다. 한달에 한번 독서모임도 연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라, 카페 이름을 하루키가 젊은 날 운영했던 재즈 카페에서 따왔다.
길을 건너면 헌책방계에서 유명한 ‘공씨책방’이다. 1990년대 작고한 공진석씨를 대신해 그의 처조카인 장화민(60)씨가 운영한다. 낡은 엘피판도 판다. 다시 길을 건너자 ‘글벗서점’이 여행자를 기다렸다. 책방만 38년 운영한 김현숙(61)씨가 반갑게 맞았다. 글벗서점을 운영한 지는 10여년. 지하와 1~2층으로 구성된 이 책방에는 책 50만권이 있다고 했다. 종교서적과 외국서적 등 종류도 다양해 마치 책 백화점 같았다.
1965년 설립된 지학사 건물을 지날 땐 동교동 일대가 책 나라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학사 1층에 직원용 카페가 있으나 일반인은 이용할 수 없다. 다음 목적지는 앞에 있는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과 ‘평화다방’이다. 2003년 개관한 김대중도서관은 아시아 최초 전직 대통령 도서관으로 1층 상설전시실과 2층 특별전시실을 공개한다. 맞은편 아담한 평화공원에 있는 ‘평화다방’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공정무역협의회’ 회원사인 ‘얼굴 있는 거래’가 운영하는 곳으로, 지난해 11월 문을 열었다. 공정무역 커피·초콜릿 등을 판다. 흔한 카페 음악도 없어 조용히 개인 작업을 하기 좋다.
벚꽃나무 조화로 테라스를 장식한 마지막 여행지인 ‘러빈허’에 도착하니 여행을 시작한 지 벌써 2시간이 넘었다. 실내는 온통 꽃 장식으로 채워져 향긋했다. 은은한 꽃 장식은 주인 오승용(35)씨의 아내 허은영(35)씨가 꾸민 것이다. 먹을거리를 주문하면 꽃다발이 같이 나온다. 찬 커피 한 잔을 주문해도 꽃 모양의 얼음이 위에 올라가 사진 찍기 근사하다. 플로리스트인 허씨는 한때 꽃꽂이 수업도 했으나 지금은 출산을 앞둬 쉬고 있다.
본래 이 카페 이름은 ‘플로르떼’로, 밖에는 아직도 이 간판이 달려 있다. 그런데 외국에도 같은 이름의 카페가 있어, 혼란을 주지 않으려고 러빈허로 바꿨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카페는 일본과 중국 잡지에 소개되면서 국제적으로 유명해졌다. 지난 5일에도 중국인과 일본인들로 앉을 자리가 없었다. 은행원이었던 오씨는 아내와 지낼 시간조차 넉넉지 않은 바쁜 생활이 싫어 다른 삶을 선택했다. 그는 그것이 ‘느린 삶’이라고 자랑했다. 카페를 나서자 바로 앞 경의선 책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B코스 예술책방길: 예술가들이 안내하는 책과 예술 여행
홍익대학교 정문 → 반디모아 → 비보이극장 → 대안공간 루프 → 뿔랄라수집관 → 툴 → 키 → 경의선 책거리
생동감이 넘쳐 뺏고 싶을 정도로 질투가 나는 젊음이 홍익대 정문 앞에 가득했다. 이들이 찾는 예술서적 전문책방 ‘반디모아’에는 그래픽, 디자인, 애니메이션, 일러스트레이션 등의 책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둘러보면 숨어 있던 예술적 감성이 삐죽삐죽 살갗을 뚫고 나온다. 일반 서점에서는 볼 수 없는 예술잡지도 많다. 걸음을 재촉해 산울림소극장 방향으로 1~2분 걷자 비보이전용극장이 나타났다. 모두 355석인 이 극장에서는 오는 31일까지 ‘쿵 페스티벌’이 열린다. 비보이 댄서들이 주인공으로, 대사 없는 청소년 뮤지컬이다.
다음 코스인 ‘대안공간 루프’에 도착하자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화려한 홍대 상권의 다른 모습인 듯했다. 지하 1층와 지상 4층의 건물로 마치 철판 몇 개를 이어 붙인 것처럼 독특한 건축물이다. 불규칙하고 특이한 계단 구조도 인상 깊다.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것이 목적인 이곳은 31일까지 ‘예술적 생존법 연구’가 전시된다. 양윤임, 서울괴담, 전민혁 등의 한국 작가와 일본 작가 오카베 도모히코 등이 참여했다. 이름만 들으면 마치 가난한 예술가들의 생존전략을 담은 전시 같지만 아니다. 일반인들이 예술적 일상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에 관한 방법을 모색하는 전시다.
30년 경력의 유명한 만화가이자 일러스트 작가인 현태준(51)씨의 나라가 곧 나타났다. ‘뿔랄라수집관’이다. 현 작가가 8년 전 ‘뿔랄라전시관’으로 연 곳으로, 지난해까지는 입장료 1000원을 받고 운영했다. 올해부터는 ‘수집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무료공간으로 변신했다. “20대에게는 1000원도 부담스러워 보였다”는 게 이유다. 특유의 위트 넘치는, 현 작가가 만든 간판에 홀려 지하로 내려가자 수염 덥수룩한 그가 반갑게 인사해 왔다. 넉넉한 풍모만큼, 99㎡(약 30평)의 공간에는 2000개가 넘는 장난감, 문구류, 피규어, 캐릭터 인형 등이 가득했다. 애니메이션 <원피스> 주인공과 국내에선 구하기 어려운 양철 인형들도 있었다. 그가 전세계를 여행하면서 수집한 것들이었다. 30년 수집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판매도 하는데, 가격은 500원부터다.
멀티숍 ‘툴’은 팝아트 일러스트레이션 작품과 독특한 모양의 신발, 향수 등을 판다. 연예기획사 ‘나린엔터테인먼트’ 대표 이애리(44)씨가 운영한다. 그는 “10~50대까지 찾는 이가 다양하다”고 했다. 툴을 지나 골목으로 접어들자 생활창작가게 ‘키’가 눈에 들어왔다. 독립예술가 200여명의 작품을 유통하는 창구다. 사회적 기업 ‘일상예술창작센터’가 운영하는 가게로 2011년 1호점을 지금의 자리에, 2015년 2호점을 연남동에 열었다. 작가의 감성이 충만한 가방, 원석을 갈아 만든 액세서리, 독특한 아기 옷과 그림, 아름다운 접시 등 온갖 생활소품들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결국 김영징 작가의 빨간 원석 귀고리를 사고 말았다. 하얀 귓불에 빛나는 빨간 귀고리가 자랑스러웠다. 보물을 얻은 심정이 돼 종착지인 경의선 책거리에 도착했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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