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젓한 도시 여행을 꿈꾸는 이들이 찾는 홍대입구역 6번출구 앞 ‘경의선 책거리’.
건축디자이너 오기사(41. 본명 오영욱)는 어린 시절 외가에 가면 혼자 낡은 철길을 걸으며 놀았다. 낯선 동네에 친구가 있을 턱이 없었다. 아침나절 외할머니가 지은 흰밥을 까만 김에 말아 먹고는 달려 나가, 직선으로 쭉 뻗은 철로 위를 양팔 벌려 걸었다. 그 길 끝에 웬만한 바람에도 끄떡없는 굵은 해바라기가 있었다. 용을 써 한 송이 뽑아 외가 마당에서 씨를 까먹었다.
외가의 인연이 이어진 걸까. 오기사는 지난해 10월 서울 마포구청이 조성한 ‘경의선 책거리’의 각종 설치물 디자인을 맡았다. 폭 15~20m, 길이 250m의 경의선 책거리(와우산로35길 50-4 일대)는 홍대입구역 6번 출구부터 와우교 아래로 이어지는 폐철로로, 그의 어린 시절 “고마운 놀이터”였던 곳이다. 책거리가 “책과 기차의 속성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지하에 묻혀 있던 암거(하수관 내 점검, 청소 등을 위해 사람이 출입하도록 만든 시설)를 끄집어내고 이어, 와우교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기차칸이 연결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암거에는 2414종 7249권의 책이 꽂혀 있다.
’경의선책거리’의 책 테마 부스 중 하나인 ‘문학산책’.
’경의선 책거리’ 책 부스 중 하나인 ‘여행산책’.
이곳은 한때 실개천이 흘러 세교동이라고 불렸던 섬 아닌 섬이었다. 경의선 책거리 총감독인 김정연(40)씨는 “과거 와우교 아래에선 살인사건이나 자살 등이 발생해 어두운 기억이 있는 곳”이었다며 “이곳이 책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사색하는 공간으로 변신해 좋은 기억이 있는 장소가 되도록 만드는 게 목적”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책거리가 들어서면서 홍대입구역 6번 출구 일대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책 읽으러 오는 이들은 물론 개를 끌고 산책하는 이들이 몰려들었다. 공항철도와 이어져 있고 게스트하우스도 많아 외국인 여행자들에게도 점수를 얻었다.
책거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생겨나고 있는 식당과 카페, 옷가게 등은 맛집 순례객과 ‘새로운 곳’을 찾는 트렌드세터를 끌어들인다. 카페 ‘그로브177’과 ‘카페 목수의 딸’, ‘몬스터케이브’, 와플전문점 ‘레인보6’, 짬뽕전문점 ‘경성짬뽕’과 빈티지 남성의류 전문점 ‘나일론 맨’, 디자이너 박정상·최정민씨의 ‘비엔비트웰브’ 등이 대표적이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서울 연남동에서 이사 오는 카페도 생겼다. 로션통 같은 용기에 밀크티를 넣어 파는 등 독특한 감성으로 유명한 라이프스타일 카페 ‘스코프 서울’이 최근 김대중도서관 앞에 문을 열었다. 법무법인 직원인 이성진(가명·30)씨는 경기 부천시에서 일을 마치고 직장이 있는 잠실로 가기 전 이 거리에 들렀다. “평소 맛집을 좋아하는데 이 동네 가볼 만한 곳이 많아졌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홍대입구역 6번 출구 근처 꽃 카페 ‘러빈허’(플로르떼)를 찾은 스물한살 동갑내기 임지윤·김민선·송연수씨.
빈티지 소품이 많은 카페 ‘더 빅 바나나’의 커피.
예술가, 창작자, 창업자와 여행자들은 무엇 때문에 이곳에 빠져드는 걸까. 최정민씨는 “강남이 가진 자들의 주류 동네라면 이곳은 비주류가 주류와 섞여 문화를 나누는 곳”이라고 평가한다. 홍대 주류 상권의 번잡한 분위기와 달리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에 끌린다는 것이다. 최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박정상씨는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나의 예술 활동을 하기에 여기가 더없이 좋다”고 했다. 조용함 속에 비주류와 주류가 섞여 뿜어내는 새로운 에너지, 이것이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홍대입구 6번 출구 일대의 ‘출구 없는 매력’이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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