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대동면옥’에서 면을 뽑는 장면. 박미향 기자
3~4명만 모이면 음식 얘기로 꽃을 피운다. ‘먹방’, ‘쿡방’은 여전히 대세다. 30도가 넘는 무더위가 들이닥치자 음식 수다의 주제로 평양냉면이 인기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는 면과 국물을 깨끗이 비운 스테인리스 냉면 그릇이 자랑스럽게 올라온다. ‘가위로 면을 잘라 먹으면 안 된다’, ‘그윽한 메밀 향을 음미하고 먹어야 한다’, ‘겨자나 식초, 넣어야 하나?’ …. 미식 수다꾼들의 냉면 논쟁도 뜨겁다.
ESC가 이런 논쟁에서 빠질 수 없다. ‘지면방송용 냉면 토론’을 긴급 편성했다. 지난 9일 열린 토론엔 대한민국의 대표적 미식가인 예종석 아름다운재단 이사장,
에 ‘국수주의자’를 연재하면서 면의 세계를 샅샅이 파헤치고 있는 요리사 겸 음식 칼럼니스트 박찬일, 평양냉면 애호가인 여행작가 노중훈이 패널로 참여했다. 사회는 ‘맛기자’ 박미향이 맡았다. 예 이사장은 “음식 담론이 가볍고 표피적이라 아쉽다. 역사 등을 살펴보는 깊이있는 논쟁이 되어야 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박찬일은 “잘못된 정보가 공신력 있는 방송을 타고 정설이 되기도 해 아쉽다”고 했다.
박미향(이하 향) 평양냉면은 대표적인 북쪽 음식이다.
예종석(이하 예) 지금 평양의 4대 냉면집(고려호텔식당, 옥류관, 민족식당, 청류관)을 몇 차례 적십자 특보로 가서 맛을 봤다. 메밀이 거의 안 들어가고 맛이 없었다. 그곳도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추다 보니 맛이 변했다고 하더라. 삶은 달걀이 고명으로 나오는 집은 옥류관밖에 없었다. 다른 곳들은 달걀지단이 고명이었다.
박찬일(이하 박) 1940년대 생긴 우래옥은 지단이 고명이다. (요즘 냉면에 대부분 들어가는) 삶은 달걀은 조리가 더 편하다. 1970년대 들어 달걀 생산량이 늘면서 대중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예 1960년대에 달걀은 매우 귀했다. 아버지와 아들만 먹는 보양식이었다.
향 냉면에 식초와 겨자를 넣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요즘 이 논쟁이 뜨겁다.
예 ‘술 먹고 안주 먹느냐, 안주 먹고 술 먹느냐’와 같다. 개인 취향이다. 늘 식초를 넣어 먹었는데 면에 뿌리 먹는 법은 평양에서 종업원에게 배웠다. 면이 꼬들꼬들해지더라. 우선 식초나 겨자를 안 치고 먹는다. 면의 상태를 확인한 후 넣을 식초 양을 대략 정한다. 면에는 식초를, 육수에는 겨자를 뿌려 먹는 편이다.
박 우래옥의 김지억 전무는 식초와 겨자를 반드시 넣어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김지억표 ‘면스플레인’(냉면을 고압적으로 가르치려는 자세)이다. (웃음) 나는 식초와 겨자 잘 안 넣는다. 그의 전통과 지금 세대의 생각은 다르다.
노중훈(이하 노) 나도 전혀 안 넣는다. 면의 상태를 확인하고 결정하는 이도 있는데 나는 그날그날 다른 면의 상태를 즐긴다.
향 메밀 면에 대해 얘기해보자. ‘그윽한 메밀 향’을 거론하는 이들이 많다.
예 여름에는 메밀 향이 거의 나지 않는다. 제아무리 식도락을 오래 즐긴 이라도 메밀 향을 맡긴 어렵다.
박 메밀 향 운운하는데 그저 소다 향일 수 있다.
향 덜 삶으면 메밀 향이 나기도 한다. 이걸 ‘그윽한 메밀 향’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메밀은 햇메밀이 맛있다. 냉면은 면을 뽑는 방식도 독특하다는데.
예 냉면은 압착면(눌러서 뽑는 면)이다. 납면(반죽을 늘리면서 만드는 면), 절면(칼로 잘라 만드는 면) 등이 있는데 압착면은 세계적으로 우리만 있다. <음식디미방>을 보면 자세한 기록이 있다. 글루텐이 형성이 잘 안되니깐 바로 뽑아 열탕에 넣어 삶았다. 지혜다.
박 뽑는 방식은 다르지만, 이탈리아에는 메밀 파스타가 있다. 메밀 반죽은 단단하게 만들어야 면이 된다. 단단한 반죽을 쭉쭉 면으로 뽑아야 하니 힘이 더 들어간다. 냉면집의 면 뽑는 이들 중에 근골격계 환자가 많다. 자동화 기계가 나오기 전에는 3명이 달라붙어서 면을 뽑았다.
향 냉면집에서 사용하는 메밀은 국내 생산 메밀이 거의 없다는데?
박 제면용으로 국산 메밀이 적합하지 않다는 이도 있다.
향 국산 메밀은 생산 지역에서 거의 다 소비된다고 한다. 강원도만 해도 막국숫집이 없는 동네가 없지 않나.
예 어느 지역에서 생산되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수입 곡물은 방부제 쓰느냐, 안 쓰느냐를 잘 따져야 한다. 최근 수입 밀가루가 문제가 된 것도 방부제 때문이었다.
농촌진흥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 메밀 재배 면적은 1960년대 이후 꾸준히 감소해 2000년 이후 2000㏊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현재 대략 2000여t 정도 생산된다. 자급률은 49.5%로 중국산 메밀 수입이 꾸준히 늘고 있다. 국내산 메밀의 가격은 1㎏당 4500원인 데 반해 중국산은 2720원이다.
노 요즘 젊은 친구들은 면이 툭툭 끊어져야 제대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찰기가 있으면 메밀 함량이 떨어진다고 판단한다. 오해다. 오히려 함량 높은 데도 많다.
향 최근엔 함흥냉면을 홀대하는 경향이 있다.
노 함흥냉면집은 많다. 반면 평양냉면집은 적다. 요즘 냉면 마니아층은 소수가 누리는 것, 우리만 아는 비밀을 공유하는 것을 좋아한다. 함흥냉면집보다 숫자가 적은 평양냉면을 선호하는 이유다. 맛 표현으로 ‘썰’을 풀기도 좋다. 평양냉면은 득달같이 달려오는 맛이 아니라 음미해야 하는 맛이다. 형용사를 붙이기 좋다.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하기 좋아 젊은 친구들이 열광하는 것이다.
예 쇠고기 좋아하냐, 돼지고기 좋아하냐 하는 것과 같다. 취향이다. 15년 전엔 나도 ‘평양냉면 맛을 알아야 미식가다’라고 말했지만.(웃음)
냉면 논쟁을 펼치고 있는 미식가 3인. 왼쪽부터 노중훈, 박찬일, 예종석. 박미향 기자
향 면을 가위로 잘라 먹으면 맛을 모른다고 무시당하기도 한다.
박 자르면 맛이 없다. 국수 길이는 물리적으로 맛의 완결이다. 국수 종류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26~31인치(66~79㎝)가 적당하다. 너무 짧으면 소스가 잘 묻지 않은 채로 끊어지고, 너무 길면 먹다가 잘라야 한다. 평양냉면의 길이는 오랜 세월 동안 계산이 되어 나온 것이다. 미각을 느낄 수 있는 최적의 길이다. 가위로 자르면 냉면이 가지고 있는 원형이 파괴된다. 식용 가위는 우리나라에만 있다.
예 가위는 식당이 아니라 재봉틀 옆에 있어야 하는 도구다. 가위 사용은 음식 먹는 예절이 아니다. 국수는 장수를 의미한다. 가위로 면을 자르는 건 목숨을 자르는 것과 같다.(웃음)
노 면을 자르지 않고 그대로 한입 넣으면 꽉 찬 느낌이 들어 좋다. 포만감이 든다. 쑥 밀듯이 넘어가는 기분도 들어 좋다.
박 일본어에 ‘노도고시’(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맛)란 말이 있다. 목넘김의 짜릿한 통증을 즐기는 거다. 냉면엔 그런 점이 있다.
예 일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는 미식가인데, 소바를 먹을 때 면을 길게 들어 한 번에 삼켰다.
박 가위는 함흥냉면 때문에 등장한 것이다. 전분이 많아 질기니 자르는 것이 편리했다.
예 함흥냉면을 좋아하는 고수는 면을 아랫입술에 두고 윗니로 끊어야 제맛이라고 한다. 가위를 쓰지는 않는다.
향 한때 평양냉면집들이 쓰는 인공조미료가 화제가 된 적 있다.
박 일제강점기부터 썼다. 대중식당에서 그걸 안 쓰고 영업하기는 쉽지 않다. 감칠맛을 즐기려는 손님의 욕망을 채워주려면 비싼 쇠고기를 오래 우려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타산이 안 맞는다.
예 어릴 때 인공조미료에 간장 풀어 밥 비벼 먹는 게 유행이었다. 최근 소비자단체 ‘소비자와 함께’에서 한 대학에 인공조미료의 유해성 연구용역을 의뢰했는데 해로운 성분은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향 육수는 우리는 재료들이 집집마다 조금씩 다르더라.
박 주로 쇠고기를 많이 쓴다. 서울에서 한우로만 우리는 데는 ‘우래옥’으로 안다.
예 노계가 들어가야 맛이 난다. 서양음식에도 치킨스톡을 거의 쓴다.
박 1993년 중국에 있는, 북한이 투자한 식당에 간 적 있다. <조선료리전집>을 발견했는데 냉면 편을 펼치니 ‘주석님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어요’로 시작하더라. 소, 돼지 닭을 다 써서 육수 우리고, 메밀 80%, 전분 20%로 면을 만든다고 적혀 있었다. ‘맛도움’(인공조미료)도 언급돼 있었다.
예 지금 냉면의 인기는 명월관의 공이 크다. 대한제국이 망하자 궁의 연회 담당이었던 안순환이 나와 연 한식당인데, ‘선주후면’을 내세워 냉면을 팔았다. 고종이 즐긴 음식이라니까 인기가 많았다. <부인필지>에 ‘명월관 레시피’가 등장하기도 했다.
향 요즘 평양냉면집은 유난히 분쟁이 많다. 맛 평가도 엇갈린다. 가격도 너무 올랐다.
예 분쟁은 재벌가에서 벌어지는 형제의 난과 같은 거다. 10년 동안 계속 가격이 올라 유감이다. 소위 4대 냉면 명가(필동면옥, 우래옥, 을지면옥, 평양면옥)들은 경쟁 식당이 올리면 따라 올리는 것 같다. 요즘 2세대 냉면집으로 회자되는 진미평양냉면은 1만원이다. 하지만 맛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평양의 냉면을 경험하고는 ‘평래옥’을 손에 꼽게 됐다.
노 따스한 제육이던데, 찬 제육의 맛이 익숙해서 아쉬웠다. 하지만 냉면집에서 냉면만 먹지는 않는다. 가격 부담이 있다. 2만원이 넘는 파스타를 예로 들어, 1만원이 넘는 냉면 가격이 결코 비싸지 않다는 이들도 있지만.
박 가격이 비싸면 그만큼의 서비스가 동반되어야 한다. 지금 명가들은 그런 점에서 아쉽다.
노 유명한 냉면집에서 불쾌했던 경험이 있다. 장충동 평양면옥은 안 간다. 강서구 대동관이나, 열심히 노력해 유명해진 능라도, 정인면옥 같은 곳이 많이 생겨야 한다.
대전 신정동의 ’숯골원냉면’의 메밀면 반죽. 박미향 기자
박 냉면집에서 기술을 배워 나온 이로는 봉피양의 김태원 선생 정도가 유명하다. 외식 현장으로 배출되는 요리사들이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평양냉면집이 적은 것이다. 외식시장에서 200만원이면 함흥냉면 레시피를 살 수 있다. 평양냉면도 있지만 명가들의 깊은 맛은 안 난다. 한편, 평양냉면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보수적이다. ‘면스플레인’, ‘평뽕족’ 등의 신조어가 생긴 것도 ‘권위에 도전하지 마라'란 의미가 담겨 있다.
예 음식 문화는 먹는 이들의 수준을 따라간다. 최근 이런 관심은 우리 음식 수준을 올리는 데 기여할 것이므로 긍정적이다.
박 외국인이 신기하게 생각하는 3가지 우리 음식 중 하나가 냉면이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간단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섬세한 맛이 숨겨져 있다. 최근의 여러 논쟁들은 긍정적인 면이 많다. 우리가 사랑하는 맛에 대해 탐구를 하는 것이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