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렬의 트래블 기어
내일 베트남으로 떠나는 출장에 제일 중요한 것을 빠뜨릴 뻔했다. 평소에는 필요 없다가 나라 밖을 넘어가려는 순간만큼은 이것 없이 절대 불가다. 여권이다. 여권 없다면 항공권도 돈도 소용없다.
여권은 구약성서에 처음 등장한다. 서기전 450년께 페르시아제국의 황제 아르닥사싸(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유대인 느헤미야에게 유디아로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는 한 통의 편지를 내줬다는 대목이다. 옛날이야기 중에 왕이 부하에게 ‘통행증명서’ 같은 것을 써줘서 빠르고 안전하게 여행하게 했다는 얘기는 자주 나온다. 중세에는 이 증명서가 납세증명서와 같아서 세금을 낸 사람만이 그 나라 국민으로서 여행을 할 수 있었다.(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세금을 체납한 사람은 출국을 금지시킨다.) 이때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왕의 증명서를 보여주고 성문(porte)을 통과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권(passport)이 항구(port)를 통과(pass)하는 증명으로 흔히 알고 있으나, 문을 뜻하는 프랑스어(porte)에서 파생된 ‘성문을 통과할 수 있는 증명서’라는 것이 정설이다.
14세기 영국의 헨리 5세가 근대적 여권을 처음 제정한 뒤 19세기 들어 유럽에 철도 노선이 팽창하고 여행자가 폭증하자 여권의 존재가 무력해졌다. 이때부터 1차 세계대전 전까지 여권이 사실상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적과 나를 구별할 필요가 생기고, 산업화에 따른 노동인구의 통제를 위해 여권이 부활하면서 현재의 여권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전자주민등록증이 개인정보와 인권을 위협할 것이란 주장처럼, 여권에 사진이 처음 붙었을 때도 거의 같은 논란들이 있었다. 여권도 인권과 자본주의의 발전와 궤를 같이해 온 셈이다. 엄밀히 말해서 여권을 가졌다고 다른 나라에 100% 입국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입국은 ‘당신은 우리나라에 들어와도 좋다’고 미리 부여해준 권리인 ‘비자’(사증)를 가진 사람에게만 허가되는 것이다. 그런데 비자를 받는 절차가 번거로우니 쌍방 국가들끼리 비자 면제협정을 맺어 여권만으로 입국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일본·타이를 비롯해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우리나라와 비자 면제협정이 맺어져 있다. 중남미나 아프리카의 먼 나라들은 비자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중국·캄보디아·인도네시아 등은 비자가 필요하지만 입국할 때 비자를 받을 수도 있다. 재작년부터 미국으로 가는 한국인들이 매우 늘었는데 “무비자가 되어서”라고 알려져 있다. 실은 인터넷을 통한 전자비자로 절차가 매우 쉬워진 덕분이다. 이것을 미리 받아두지 않으면 미국 입국이 불허되고 이렇게 입국한 뒤 불법체류가 많아지면 예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또 9·11 테러 이후 미국·일본 등에 입국할 때는 전자지문에 사진까지도 찍혀야 한다. 돈의 세계화는 이뤄진 반면, 인류의 세계화는 지나야 할 문이 늘어 가고 있다. 외교통상부의 ‘해외 안전여행’(www.0404.go.kr)에는 각국 입국 정보와 여권 정보가 가득하다.
글·사진 호텔자바 이사 www.hotelajva.co.kr
글·사진 호텔자바 이사 www.hotelajv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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