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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모든 일에 때가 있다고 합니다. ‘적기’라는 거죠. 세상일이 대개 그렇습니다. 너무 서둘러서도 안 되고, 너무 기다려서도 안 됩니다. 이번에 표지 이야기로 취재한 사격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었습니다. 사격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모든 신경을 총구 끝에 집중하다가 때를 놓치지 말고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행기자를 해오면서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가 “이맘때 딱 떨어지는 적기 여행지가 어디냐”는 것입니다. 여행에도 ‘적기’라는 게 있다는 거죠. 요즘처럼 날씨가 뒤죽박죽인 때엔 더 그렇게 느껴집니다. 기상청이 해마다 이맘때 발표하는 ‘벚꽃 개화 시기’가 있습니다. 지난주 기상청 발표 자료를 보면 만개한 지역별 벚꽃 감상의 적기는 3월25일 무렵엔 제주 서귀포, 3월26일~4월2일엔 남부지역, 4월3일~4월14일엔 중부지역이 됩니다. 만개한 벚꽃 감상 여행을 계획하신 분들이 참고할 만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여행을 떠나는 데 과연 ‘적기’란 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행은 일상을 털고 낯선 풍경 속으로 들어가 심신 재충전을 꾀하는 일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벚꽃 만개 적기를 택해 한곳으로 몰려가고, 여름철 7월말~8월초에 일제히 휴가를 내 동해안으로 몰려가는 것이 우리들이 해온 여행 방식입니다. 너도나도 ‘특정한 때’를 기다려 ‘특정 지역’으로 몰려가는 여행. 이미 ‘여행의 적기’가 아니라, 오히려 여행을 피해야 할 시기입니다. 전남 보성 득량면 오봉리에 고택 즐비한 ‘강골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선 해마다 4월 철쭉 축제를 엽니다. 철쭉이 지천이냐고요? 한 고택 앞뜰에 있는 단 두 그루의 철쭉을 놓고 여는 축제입니다. 이름도 ‘두 그루 철쭉제’죠. “고정화·획일화된 행사에서 벗어나 새 시각으로 자연을 보자”는 취지로 주민들이 여는 행사입니다. 발상을 바꿔 오히려 관심을 끄는 마을이죠. 여행도 발상을 바꾸면 하루하루가 ‘여행의 적기’일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내가 떠날 수 있을 때, 떠나고 싶은 때가 바로 여행의 적기 아닐까요. 요즘처럼 날씨가 궂어도, 꽃이 덜 피었거나 이미 졌어도, 단풍이 시원찮아도, 떠나고 싶을 때 떠나 들여다보면, 사소하면서도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것들이 지천이니까요.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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