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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소개팅 나가서 남자보다 키가 크다는 이유로 차여본 적은 있지만 같은 이유로 남자를 차본 적은 없는 제가 딱 저만한, 그러므로 언뜻 보기는 저보다 작아 보이는 남자와 같이 살게 된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외모차별주의와 거리가 먼 반듯한 심성의 소유자인 저에게도 갈등과 고민의 순간이 딱 한 번 있었으니 바로 결혼식을 앞두고 있을 때였죠. 레이스 달리고 굽도 있는 웨딩슈즈는 언감생심, 납작한 플랫슈즈를 신어도 머리에 면사포를 올리고 나면 신랑보다 불쑥 커지는 키 조합은 차마 아름다운 황금비율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더군요. 턱시도를 한껏 차려입은 신랑에게 면박을 줄 수도 없고 난감해서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눈치 빠른 웨딩숍 직원이 웬 구두 한 켤레를 들고 왔습니다. “키높이 구두를 한번 신어 보시면 어떨까요?” 지금처럼 키높이 구두나 깔창 같은 게 흔하기 전이라 처음에는 뜨악했죠.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지만 그 구두를 신어본 순간, ‘매직’의 세계가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신발 크기가 신랑의 원래 발보다 10㎜ 정도 작았던 것. 어디 올라간 것처럼 붕 뜬 기분인데다가 발가락이 접혀서 예식 내내 신고 있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신랑은 하소연했지만 이미 티브이 드라마 속 남녀 커플의 실루엣에 빠져든 신부는 “그럼 키 좀 크게 태어나지 그랬냐”는, 연애 기간 깊숙이 숨기고 있던 본성을 기탄없이 드러내며 신을 것을 종용했습니다. 웨딩숍에 딱 한 켤레 샘플로 있던 신발이었거든요. 그렇게 신랑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누운 나그네의 심정으로 발끝의 애환을 구두 속에 숨기고 입장을 해야 했습니다. 최근 한 결혼정보업체와 대학 연구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혼여성이 원하는 배우자의 키가 177㎝를 넘는다죠. 또 180㎝(여 165㎝)에 대한 부모들의 꿈 때문에 아이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고 합니다. 외모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믿어왔던 저이지만 결혼사진 속, 고통을 숨기고 억지웃음을 짓는 남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아이 손잡고 성장클리닉을 찾는 미래의 저를 보는 것 같아 은근히 두렵습니다. 김은형 〈esc〉 팀장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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