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찰의 물대포에 대비해 우비를 입은 여학생들이 1일 저녁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행진을 막고 있는 경찰을 향해 야유를 보내고 있다.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촛불집회는 지루합니다.
사람이 많으면, 때로 그렇습니다. 지난 5월31일 저녁 7시, 서울 시청앞 서울광장엔 수만명이 모였습니다. 그 인파 속에 어중간하게 들어갔다간 재미없습니다. 머나먼 무대.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쉽게 빠져나오지도 못해 갑갑합니다.
행진이 시작되면 한결 낫습니다.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거리는 생동감이 넘칩니다. 젊은 친구들의 풋풋한 퍼포먼스를 보는 재미는 짭짤합니다. 더 흥미진진한 것은 가로막힌 장애물을 대중들이 즉흥적으로 돌파해 나갈 때입니다. 그 과정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예측불허의 상황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합니다. 바리케이드로 세워진 전경버스 위에서 어느 고등학생은 108배를 하고, 누군가는 사다리를 가져오고, 또 누군가는 밧줄을 구해옵니다. 즉석에서 구사되는 기발하고 재치있는 구호들도 웃음을 선사합니다.
그러나 재미는 분노로 변했습니다. 키득거리고 즐기면서 시위를 하기는 곤란해졌습니다. 경찰의 ‘대포사격’(!)이 1980년 광주의 실탄사격과 맞먹는 무게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재밌습니다. 이 드라마가 6월에 어떻게 전개되고, 어떻게 막을 내릴지 너무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내일도 보고 싶고, 모레도 보고 싶은 드라마. ‘미드’와 ‘일드’를 능가할, 함께 만드는 ‘촛드’입니다. 이번 호 커버스토리엔 미안하지만, 유로 2008 드라마는 잽도 안 됩니다.
그 궁금함은 결국 이명박의 Esc입니다. 그는 과연 그 자판을 어느 선까지 누를까요. 당장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위생조건의 관보 게재에 관해 Enter 대신 Esc를 눌렀습니다. 이미 완료된 미국과의 협상 내용에 관해 Esc를 누르고, 다시 프로그램 깔자고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각을 몽땅 Esc 할지도 뜨거운 관심사입니다. 아니, 과연 자신의 대통령직을 두고도 Esc를 누를까요?
고경태/ <한겨레> 매거진팀장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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