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를 누르며
[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스르르륵, 스르르륵, 끽, 끽….
사위가 고요해지면 소리가 들립니다. 무엇인가가 오르락 내리락 거립니다. 살포시 은밀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밤이 깊을수록 소리는 또렷해집니다. 스르르륵, 스르르륵, 끽, 끽…. 여덟살 소녀는 무서움에 잠을 설칩니다. 혼자 못 자겠다고 울면서 떼를 씁니다. 기어코 엄마를 데려와 눕힙니다.
낡은 엘리베이터가 웁니다. 소녀가 자는 문간방 옆에서 스르르륵, 스르르륵, 끽, 끽…. 그 엘리베이터에 누가 탔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무서운 뉴스를 본 날이면 악몽도 꿉니다. 살인자가 마스크를 쓰고 폐쇄회로티브이를 의식하며 토막사체를 여행용 가방으로 나르는 꿈. 소녀는 꿈에서도 궁리합니다. 그 아저씨는 정과 망치로 죽였을까, 아니면 야구방망이로 죽였을까?
영화 <추격자>는 별로였습니다. 각오 단단히 하고 봐서 그랬는지, 그다지 공포스럽지 않았습니다.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는 여인의 머리를 향해 사정없이 망치를 내리쳐도, 칼로 쑤셔도, 골프채를 휘둘러도, 머리통이 수족관에 둥둥 떠다녀도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영화를 압도하는 현실 덕분에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상상만 해도 어지럽습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자신의 아파트에서 옛4번 타자에게 무차별 스윙을 당했을 그 소녀들은 말입니다.
저희 집 소녀는 오늘 밤에도 엄살을 떱니다. 엘리베이터가 왠지 더 음산한 소리를 낸다며, 절대 혼자서는 못 잔다고 시위를 합니다.
험한 세상, 소녀를 한없이 보호할 수만은 없습니다. 온갖 위험이 병풍처럼 둘러싸도 언젠가는 떠나야 합니다. 그 때에 아빠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이번호 〈Esc〉는 그것에 관해 작은 생각거리를 던집니다. 5면에 새로 연재되는 ‘박정석의 오리엔탈 스타일’입니다.
소녀는 여행을 통해 허허벌판에 섭니다. 알을 깹니다. 그렇게 성장하기까지 이땅의 소녀들이여, 무사하기를!
고경태/ <한겨레> 매거진팀장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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