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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8)
[매거진Esc] 김은형의 웃기는 영화
<추격자>를 본 다음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고 나니 완전히 파김치가 된 기분이다. 보는 사람의 피를 말리는 긴장감을 유발한다는 점-만화처럼 심장이 가슴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말고도 두 영화는 공통점이 있다. 피는 있겠지만 눈물은 확실히 없는 살인마들이 등장하는데다 이 세상은 더 이상 구원받을 길이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 암울함을 후유증으로 남긴다.
두 작품 가운데 나는 <노인을 위한 나라>를 한 수 위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영화에는 유머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코언 형제는 “코미디를 좋아하는 게 뭐 어때서?”라고 외치면서도 타르콥스키 마니아나 자장커 지지자들 앞에서는 어쩐지 작아지는 사람들에게 든든한 보루와도 같은 존재다. <총알 탄 사나이> 못지않게 큰 웃음을 제공하는 <아리조나 유괴사건>을 보면서 작가 영화를 감상한다는 보람까지 느낄 수 있다니 이야말로 일석이조다.
코언 형제의 영화 리스트는 유머의 단계별로 분류할 수도 있다. <아리조나 유괴사건>이나 <위대한 레보스키>처럼 문자 그대로 뒤집어지는 영화들이 있는가 하면 <참을 수 없는 사랑>이나 <허드서커 대리인>,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나 <레이디 킬러>처럼 허허실실 웃음 속에 배가 산으로 가는 과정을 담은 작품들이 있으며 사람을 갈아 죽이면서 실소를 자아내는 <파고>처럼 폭력과 유머가 공존하는 영화들도 있다. 이 가운데 난이도가 높은 건 역시 세번째 경우이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중에서도 두 요소의 끈끈한 조합이 목을 조르는 느낌까지 들 정도다.
이 해괴한 조합을 온몸으로 웅변하는 게 이번에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하비에르 바르뎀이다. 그가 연기하는 안톤 쉬거는 ‘내추럴 본 킬러’라는 단어가 딱 들어맞는 괴물이다. 그런데 그의 외모는 70년대 한국 중소도시 음악다방의 디제이다. 청재킷과 세트로 입은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찰랑거리는 단발머리를 빗어 넘길 도끼빗을 당장이라도 꺼낼 것 같은 분위기다. 살인무기로 가지고(끌고) 다니는 산소탱크는 또 어떤가. 길거리에서 만나면 피식 웃음이 나올 것 같은 이 인물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먹잇감과 관객을 공포로 몰아넣는 과정은 이 영화의 최고 명장면이다.
이 영화는 긴장감이 하도 팽팽해서 곳곳에 심어 놓은 농담들을 느긋하게 씹어 넘기기란 쉽지 않다. 픽 하고 웃었다가 그런 자신의 웃음소리에 화들짝 놀랄 지경이다. 이 형제의 못 말리는 유머감각에 희롱당한다는 느낌까지 들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장면, 안톤 쉬거를 제거해 달라는 제안을 받은 칼슨 웰즈(우디 해럴슨)가 의뢰인과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나가다가 “주차권 도장 좀 찍어주세요”라고 말할 때 인상을 팍 쓰며 “지금 농담하는 거지?”라고 받아치는 의뢰인의 심정과 이심전심이 되는 듯하다.
웃는 것도 쉬운 게 아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웃음도 때로는 훈련이 필요한 유희라는 걸 보여주는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배꼽 잡은 사람이라면 코미디 팬의 본좌라고 추앙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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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의 웃기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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