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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은 거기 있었나

등록 2008-02-13 18:55수정 2008-02-13 19:05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2008)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2008)
[매거진 Esc] 김은형의 웃기는 영화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2008)

연휴 마지막 날에 티브이에서 활활 타는 남대문의 기와가 우지끈 무너지는 걸 실시간으로 보면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인생도 역사도 한방이구나. 절대적으로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생생하게 다가왔던 건 허무함이었다. 허무함이 이렇게 생생할 수도 있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600년 동안 거기 서 있었던 건물이, 임진왜란 때도 거기 서 있었고, 6·25 전쟁이 폐허에서도 당당하게 서 있던 건물이 시너 한병에 이렇게 무너질 수도 있구나. 이런 건 영화에서나 나올 만한, 그것도 컴퓨터그래픽으로나 볼 수 있는 장면 아닌가? 게다가 국가적 명운이 달린 음모를 도모하는 악한이 삼엄한 군 경비를 뚫은 것도 아니고, 테러리스트 비행기의 정면 충돌도 아니고, 땅값 보상때문에 ‘성질난’ 노인이 ‘소 쿨’하게 걸어온다-사다리 놓고 올라간다-시너 뿌리고 불 붙인다-내려온다-사다리 들고 집에 간다-로 끝나는 스토리라니, 이건 바트의 장난질에 열 받은 호머 심슨이 바트의 장난감 폭죽을 빼앗아 내던져 버리다가 자유의 여신상을 폭파시킨다는 수준의 농담이다. 진짜 농담이라면 웃을 수나 있지.

남의 이야기라면 김빠진 웃음밖에 안 나올 남대문 잿더미를 보면서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가 생각났다. 별 상관도 없는 이야기인데 허무해서 그랬을 거다. 이 영화에서 방송진행자인 주인공은 그때, 차우셰스쿠가 독재자 궁을 빠져나가던 때의 동네 현장을 재구성해보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은 마을 광장에서 데모대를 구성했다고 말하는 역사 교사의 증언을 부정하는 전화(“시위 같은 소리하네, 밤새고 술 처먹는 걸 내가 똑똑히 봤는데”)가 쏟아져 오고, 또 그가 악질 비밀경찰로 묘사했던 사람은 품위 있는 자본가가 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또 다른 게스트인 동네 노인은 방송에도, 혁명의 재구성에도 관심 없이 딴 짓만 한다. 지독한 허무 개그다. 하지만 역사를 조롱하려는 악질적 농담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사실이 그러했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할리우드 액션 스타에 자신을 투사해서 영화를 보지만 우리 대부분의 실제 삶은 홍상수 영화에 가까운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할까. 혁명을 재구성하려던 야심은 역사 교사가 그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재구성으로 바뀐다. 거대한 문패 아래서 그때 화장실을 갔는지, 화장실엔 안 갔는지 치고받는 옹졸한 설전이 키득키득 배꼽을 간질이지만 마음이 스산하다.


김은형의 웃기는 영화
김은형의 웃기는 영화
그가 그때 거기 있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모든 게 새빨간 거짓말일 수도 있고, 역사 교사이다 보니 반복되는 수업을 통해 내면화된 착각을 만든 것일 수도 있다. 시종 산만하게 꼼지락대다 발언 기회를 얻은 동네 노인이 그때를 기억하는 건 혁명의 비장한 기운과 거리가 멀다. 어쨌거나 혁명은 그렇게, 만화 <톰과 제리>를 보다가, 아내와 화해하기 위해 꽃을 사러 나갔다가. 차우셰스쿠의 도주 뉴스를 보고 광장으로 나왔던 시간으로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문득 나도 헷갈려진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었던, 그 남대문을 내가 봤던 게 맞을까. 그 건물은 정말 600년 동안 거기 서 있던 게 맞을까. 어쩐지 아득한 기억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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