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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아, 우산을 멜 수도 있구나.
두 달 전 어느 디자이너의 사진전에 갔습니다. 주최 쪽에선 방문객들에게 긴 우산을 기념품으로 주었습니다. 별생각 없이 받았는데, 나중에 뜯어보니 무척 신선했습니다. 우산집에 멜빵이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내에서는 어깨에 메고 다닐 수 있도록 돼 있었습니다. 마치 초소를 지키는 군인들이 엠16 소총을 메듯 말입니다. 아이디어가 담긴 작은 선물에 소박한 기쁨을 얻었습니다.
이번호 ‘얼리어답터 찜!’(10면)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비가 오는 거리에서도 아기를 두 손으로 안고 다닐 수 있는 핸즈프리 우산입니다. 가방을 메듯 자유자재로 감아서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누가 그런 멋진 상상력을 발휘했을까요. 아이디어는 인간의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합니다.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생활이 윤택해집니다.
커버스토리를 읽으면서도 빛나는 아이디어에 감탄했습니다. 주방의 구조에 관한 겁니다. 그동안의 주방은 거실을 등지고 작업하는 공간 형태였습니다. 전문가들은 그걸 뒤집어보라고 권유합니다. 거실에 있는 가족과 마주 보며 요리도 하고 설거지도 하라고 합니다. 왜 그동안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요. 발상의 전환이 가사노동의 소외를 막아줍니다. 가족관계의 새로운 철학을 심어줍니다. 수천만원짜리 주방기기보다 훨씬 비싼 아이디어입니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고통스럽습니다. 기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는 아이디어 회의입니다. 바다처럼 넓은 지면을 머리 굴려 꾸며야 하는 건 스트레스입니다. 일뿐만이 아닙니다. 먹고 입는 것도 그렇습니다. 아침에 무슨 옷을 입을지, 점심에 무엇을 먹을지 아이디어를 내는 일도 힘겹기만 합니다. 날카로운 기획 구상에서 일상적인 잔머리까지, 늘 아이디어가 충만하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고경태/<한겨레> 매거진팀장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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