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릇푸릇해서 시야가 좋잖아요. 평지라서 좋고 비가 와도 우산이 거추장스럽지 않으니 더 좋아요. 전철역에서도 가깝고요. 서울에 이만한 데가 없지요. 도심이라 너무 좋습니다.” 지난 11일 서울 구로구에 있는 항동철길에서 만난 ‘우리들 참사랑’의 카페지기 최순자(66)씨가 한 말이다.
그는 회원 14명과 이날 오전 11시부터 구로구에 있는 푸른수목원을 걷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등산복으로 차려입은 회원들은 대부분 ‘실버 걷기 선수’들이다. 2018년 문을 연 인터넷 카페 가입 조건이 65살 이상이다 보니 회원 모두 노년층이다. 매주 수요일마다 걷기 여행을 하는 이들은 이날 푸른수목원과 항동철길 코스를 골랐다. ‘프로’들이 고른 데치곤 생소하다. 서울 시민들도 잘 모르는 ‘숨은 맛집’ 같은 곳이다.
2013년에 개원한 푸른수목원은 서울시 1호 공립수목원이자 서울에 있는 유일한 수목원이다. 1380여종의 자생식물이 서식하는, 대도시 수목원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울창한 숲과 저수지를 품은 생태계의 보고다. 그런가 하면 항동철길은 7~8년 전까지만 해도 열차가 다닌 흥미로운 생활사 현장이다. 심해에 묻힌 보석 같은 여행지 둘이 이제 반짝반짝 빛을 내며 여행객을 기다린다.
짙은 녹색 나무를 양옆으로 끼고 쭉 뻗은 항동철길. 비가 오는 날에도 찾는 이가 적지 않다.
지난 11일 폭염과 작별을 고하는 비가 서울을 찾았다. 가는 비가 내리는 푸른수목원(구로구 서해안로 2117·이하 수목원)은 들머리부터 상쾌한 공기가 흐드러지게 번져 있었다. 입구에는 희한하게 입장권을 파는 부스가 없었다. 새벽 5시부터 밤 10시까지 여는 수목원은 입장료가 없다. 누구라도 무료로 이용 가능한 개방형 수목원이다. 수목원 숲에서는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피아노의 숲’처럼 말이다. 이시키 마코토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이 애니메이션은 등장인물 모두 음악을 매개로 성숙해지는 과정을 그렸다. 영화는 어린 주인공이 숲에서 피아노 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소리가 들리다니…. 숲의 나무와 줄기, 꽃잎에 빗방울이 부딪치고 저수지에서 튕겨 나가면서 내는 소리였다. 심장을 요동치게 하는 음악은 궁극적으로 자연의 소리와 닮아 있는 법이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항동저수지. 수목원의 김윤주(48) 숲해설사는 철새가 날아들고 수생식물이 번식하는, 생태계가 살아있는 저수지라고 했다. 전체 20만956㎡(6만895평) 수목원 부지에 대략 5분의 1을 차지하는 저수지의 물은 본래 농업용수였다. 그러니까, 수목원은 본래 논과 밭이었던 것. 개발제한구역 훼손과 무분별한 개발을 막고자 한 산림청의 ‘1시·도 1수목원 조성사업’과 연계해 서울시가 2009년 수목원 조성에 나서면서 공사가 시작됐다. 숲의 치유력은 이미 검증된바, 수목원이 제공하는 힐링은 견줄 데가 없어 보인다. 적어도 서울에서는 말이다.
항동저수지 한쪽엔 나무 데크가 불판 위 곱창처럼 고불고불 설치돼 있다. 데크 길을 걷는 내내 풍경이 달라진다. 왜개연꽃, 가시연꽃, 참개연꽃, 수련, 개연꽃 등이 가득한 광경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넉넉해진다. 세계 여러 지역에 서식하는 80여종 수련과 식물 중에 한국엔 이들 5종이 산다고 한다.
수련의 향연이 끝나자 이번엔 커다란 연잎 위에서 잠자는 흰뺨검둥오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놈 참, 맹랑하네’란 생각이 든다. 사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비를 맞으면서도 오수의 즐거움에 빠져있다. 주로 낮에 활동하며 암수가 함께 알을 품는 왜가리, 이마가 흰색인 여름 철새 물닭, 몸길이가 90㎝인 중대백로 등도 서식한다.
새들만 점령한 수목원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밝은 녹색의 등 양쪽에 2개의 금색 줄이 불룩하게 솟아나 있는 금개구리도 산다.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인 귀한 몸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참개구리뿐만 아니라 잉어, 붕어, 가물치, 메기 등도 이곳에 있으니 이만하면 수생동물대백과사전이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김 해설사는 “이곳은 습지원이 잘 조성돼 부들·갈대 같은 수생식물이 잘 자라고, 구근원에는 튤립·수선화 같은 식물들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부들의 꽃가루는 지혈제로, 잎과 줄기는 부채 등의 재료가 된다니 ‘그놈 참, 기특하다’란 소리가 절로 난다. 애기부들·마름 뿐만 아니라 줄과 갈대도 자생하는데, 이 둘은 모양새가 비슷해 혼동하기 일쑤다. 줄은 길이가 1~2m, 갈대는 3m다. 둘 다 더러운 물을 정화시키는 데 요긴하지만 줄은 진흙땅에, 갈대는 진흙이 적은 땅에 산다.
울창한 숲 사이에 난 오솔길은 ‘나 홀로’ 걷기에, 곳곳에 설치된 정자와 그네는 걷다가 ‘잠깐 멈춤’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허난설헌의 ‘채련곡’이 적힌 천이 걸려 있는 나무 앞에서도 발걸음이 멈춘다. ‘가을 맑고 긴 호수는 푸른 옷처럼 흐르고/ 연꽃 깊은 곳에 목란 같은 배 매어놓고/ 낭군 만나러 물 건너편으로 연꽃 던지니/ 멀리 사람에게 알려져 하루 종일 부끄러웠네.’ 이 글은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주인공 고애신(김태리)이 유진초이(이병헌)에 대한 연정을 드러내는 장치로 등장한다. 여행객은 찰나지만 잠시 ‘애신 아씨’가 되어 각자의 ‘유진초이’를 떠올린다. 주름진 노년이라도 솜털 같은, 떫디떫은 청춘은 있었기 마련이다.
김 해설사는 가을이 오면 볼거리가 더 풍부해진다고 말한다. 석산(꽃무릇), 벌개미취, 쑥부쟁이 등이 핀다. “꽃향기가 수목원에 그윽하게 퍼지죠.” 석산은 꽃말이 애잔하다. 이성을 혹하게 하는 화려한 붉은 빛깔의 꽃과 공포에 떨게 하는 알뿌리의 독성이 모두 있는 신기한 꽃 석산. 그래서 ‘죽음의 꽃’으로 불린다.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슬픈 추억’ ‘이뤄질 수 없는 사랑’ 등이 꽃말이다. 주제가 다른 20개 정원 중 하나인 야생화원에서는 꼬랑사초, 대청부채, 자주조희풀 등 여러 가지 꽃을 발견할 수 있다. 어디선가에서 빗소리를 이길 만큼 크게 퍼지는 새소리가 들려온다. 김 해설사가 그 이유를 알려준다. “새들이 산에 먹을 게 없으면 여기로 와요. 활엽수·침엽수 등 소나무부터 온갖 나무가 많으니까요. 먹을 게 많죠.”
대기업에서 정년퇴직하고 안내센터에서 현장반장 업무를 하며 제2인생을 꾸리고 있는 윤동진(61)씨는 “인공적인 조성은 거의 없는 친환경 수목원”이라며 “자연환경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소중한 마음을 갖게 하기에 좋은 곳”이라고 말한다. 반려견 동행이 가능하고, 대여용 휠체어도 여러 대 준비돼 있다. 하지만 휴지통은 없다. 여행객의 쓰레기는 자신들이 처리하는 게 원칙. 현대적인 시설을 잘 갖춘 항동푸른도서관도 있다. 숲해설사 동반 투어도 가능하다. 서울시 공공예약 시스템이나 수목원 누리집에서 신청하면 된다.
푸른수목원에 있는 ‘항동푸른도서관’. 깨끗하고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도서관이 숲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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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원에서 서쪽으로 걸어 다문화 가정 학생 대상 ‘지구촌학교’ 건물 앞에 도착하면 바로 옆에 철길이 보인다. 철길은 아파트와 빌라들 사이에서 위축되지 않고 곧게 뻗어 있다. 그 길을 따라 다시 5~7분 수목원 방향으로 걸어가면 철길 양옆으로 울창한 숲의 위엄이 드러난다. 아기자기한 조형물도 나타난다. 철길 모양의 의자와 낮은 지붕으로 구성된 간이역이다. 지붕 위에 ‘항동철길역’이란 글자가 적힌 팻말이 붙어 있다. 가로등 표지판에는 개성과 해남이란 글자와 함께 화살표가 그려져 있다.
항동철길 중간에 설치된 간이역 조형물. 2015년 항동철길 아트 프로젝트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이 철길은 ‘철길 산책로’란 별칭이 붙은 항동철길(구로구 오리로 1189)로 오류선의 일부 구간이다. 정식 명칭은 오류동선이다. 간이역 구조물은 2015년 항동철길 아트 프로젝트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총 길이 4.5㎞, 폭 3m인 이 철길은 구로구 오류2동에서 부천시 소사구 옥길동으로 이어지는 단선철도다. 우리나라 최초 비료회사인 경기화학공업(현 케이지케미컬)이 옥길동에 공장을 지으면서 원료나 생산품 등을 실어 나르기 위해 1957년 착공해 1959년에 준공한 산업철도다.
삼천리연탄, 대원강업, 일산제강(동부제강) 등 기업들의 화물 수송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다가 경기화학공업의 공장 이전, 항동공공주택지구 개발사업 등으로 폐선이 됐다.
철길 바닥을 보면서 걸으면 인생사 글귀를 발견한다. ‘○○살의 나를 만나다’, ‘8살 첫 등교 날’, ‘25살 청춘은 용감했다’, ‘31살 엄마 아빠가 되다’, ‘42살 부모라는 무게’ 등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겪게 되는 부침이 적힌 문구다. 그 글귀들이 가슴에 박힐 때쯤 수목원 정문이 보인다. 이 지역이 수목원으로 개발되기 전 철길은 서울이지만 농촌 풍경을 오롯이 담은 순박한 곳이었다. 이젠 영화 ‘건축학개론’의 철길 장면을 비슷하게 연출할 수 있는 세련된 곳으로 차츰 알려지고 있다.
남산, 북촌, 성수 카페거리 등 서울의 이름난 여행지는 주로 한강을 중심으로 북쪽과 서쪽에 몰려있다. 1963년께 서울시에 편입된 구로구에도 도시의 불안을 잠재울 만한 아늑한 여행지가 있었다. ‘구로공단’(정식 명칭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으로 상징되는, 저임금에 시달린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으로서의 역사적 의미를 가진 이 지역은 이제 디지털단지 등이 들어선, 깔끔하고 단정한 곳인 동시에 여행 보물단지도 갖춘 지역이 됐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