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태백시 함백산 위에 펼쳐진 은하수. 태백시 제공
광합성에 필요한 엽록소가 없는 식물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지구에서 살 수는 있을까? 지난 15일 태백 두문동재(1268m)에서 금대봉(1418m)~분주령(1080m)~대덕산(1307m)~검룡소(929m)로 이어지는 총 8.7㎞ 거리의 태백산국립공원 야생화트레킹에 안내자로 나선 안주봉(57) 태백산국립공원 해설사가 답을 알려줬다. 그는 숲에 소담하게 핀 청초한 나도수정초를 가리키며 “엽록소가 없어서 광합성을 할 수 없는 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잘 피는 이유는 땅속에 비밀이 있다”고 했다. 나도수정초는 생존을 위한 영양분을 땅속에서 다른 식물들과 공생하는 균류로부터 받는다고 했다. 국내 최고라 평가받는 야생화 군락지인 이 지역에서 발견하는 신비로운 식물은 나도수정초만이 아니다. 범꼬리, 동자꽃, 할미밀망 등 생경한 이름의 꽃들이 아담한 자태로 여행객을 맞는다. 해발고도 900~1100m에 자리한 태백. ‘하늘 아래 첫 도시’라는 별칭답게 한국에선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도시다. 대도시 사람들이 30도 넘는 폭염에 시달릴 때도 이곳만은 서늘한 기온으로 여름을 잊게 한다.
엽록소가 없어 광합성은 못하지만, 땅속 균류에서 영양분을 받아 꽃을 피우는 나도수정초. 박미향 기자
지난 15일 오후 강원도 태백과 정선의 경계인 두문동재에 도착했다. 태백 야생화트레킹의 출발지다. 비 소식이 여행자들을 움츠러들게 했지만, 옅게 깔린 안개가 기대를 품게 했다.
이 고개 이름은 ‘두문불출’이란 말의 유래가 된 두문동에서 파생된 것이다. 조선 개국을 인정할 수 없었던 고려 신하들이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을 만나러 삼척에 갔다가 그가 이미 죽은 것을 알고 개탄하며 이 고개 아래 정선에 터를 잡는다. 그들은 마을 이름을 두문동이라 하고, ‘두문불출’ 은거에 들어간다. ‘집에만 있으면서 바깥 외출을 안 한다’는 뜻인 두문불출에는 이들의 신념이 담긴 것이다.
트레킹 탐방로 들머리는 해발고도 1000m가 넘는 고지대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완만했다. 초등학생이 걷기에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길은 얇은 이불처럼 폭신하고, 수천년 대지와 바람의 이야기를 품은 것처럼 숲은 우거져있었다. 키 큰 나무 아래 펼쳐진 녹색의 향연들 사이로 노랗고, 붉고, 흰 야생화들이 제 모습을 한껏 자랑하고 있었다.
안 해설사는 “7월 중순에 오면 더 만개한 꽃을 볼 수 있다”며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저들(야생화)의 사는 방식대로만 피고 지는 천혜의 자연이 숨 쉬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이 꽃 좀 보시라”라며 손가락을 가리키는 데엔 안테나 모양의 꽃이 피어있었다. “나도범의귀라는 꽃인데, 태백에서만 볼 수 있다”고 했다. 한참을 걷다 고개를 드니, 희한한 나무가 앞에 나타났다. 나무에 밥이 잔뜩 꽃처럼 피어 있었다. 안 해설사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며 ‘백당나무’라고 했다. 그는 꽃잎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 꽃은 가짜입니다. 진짜 꽃은 안쪽에 숨어 있어요.” 짙푸른 나무 위에 핀 꽃들이 흰 쌀밥 색인데다가 나무를 온통 뒤덮고 있는 모양새가 고봉밥처럼 푸짐해서 든 착각이었다.
금대봉 일대에 핀 범꼬리가 군락을 이룬 모습. 박미향 기자
대덕산을 포함한 금대봉 일대 126만평은 1993년 환경부가 지정한 생태경관보전지역이다. 태백시 자료를 보면 멸종위기 야생식물 7종, 한국 특산 식물 15종, 희귀 식물 16종을 비롯해 500여종의 다채로운 식물이 자생하고 있는 국내 최고의 야생화 군락지다. 시는 이들 야생화 보존을 위해 하루 탐방객 수를 50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입산 가능한 시기도 4월20일부터 9월30일까지다.
두문동재에서 15~20분 걸으면 고목나무샘 방향과 금대봉 갈림길이 나온다. 금대봉 정상을 거치는 트레킹이 정석이겠으나, 상대적으로 다소 가파른 금대봉 정상 등반은 포기하고 우회해 가는 고목나무샘 방향으로 향했다. 대낮인데도 어둑해지는 날씨 때문이었다. 한동안 좁은 흙길을 걷자 잘 정돈된 나무 데크 길이 나타났다. 탁 트인 시야 때문에 여행자들의 인증샷 장소로 사랑받는 지점이다. 다시 숲길로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까, 비가 쏟아졌다. 금대봉 갈림길에서 약 1시간(1.9㎞) 지난 지점이었다. 분주령까지는 남은 거리도 약 1.9㎞. 키 큰 나무의 잎사귀에 툭 떨어진 빗방울은 그 기세를 몰아 땅으로 망설임 없이 돌진했다. 빗줄기가 섞인 운무가 나무들을 휘감자 숲은 천상의 화원으로 변했다. 후드득 툭툭 또르르 똑똑. 비가 나무와 풀과 꽃을 악기 삼아 연주를 시작했다. 야광나무, 감자난초, 쥐오줌풀 등 야생화들이 너도나도 동참했다. 자연이 빚은 예술에 흠뻑 취했다. 흠뻑 젖은 몸을 돌볼 여유마저 귀찮아질 정도였다. 누군가 몽롱한 정신을 깨웠다. “술 만드는 데 쓰는 꽃을 아십니까?” 안 해설사였다. 누군가 답했다. “산사춘 말하는 거죠?” “맞습니다.” 그가 조심스럽게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렸다. “‘산에서 나는 사과’란 뜻의 산사춘입니다. 술에는 0.06%만 들어간다지요.”
여행객이 애기괭이밥을 찍고 있다. 박미향 기자
산꿩의다리, 짚신나물, 딱지꽃, 여우오줌, 솔나리, 산제비난, 개병풍, 쥐털이슬, 구슬댕댕이, 고광나무, 전호, 노랑장대, 미나리아재비, 꼭두서니 등 수백가지 야생화를 만난다. 그 앞에서 숙연해진다. 잘난 체하지 않고 숲과 나무와 공생하는 법을 터득한 야생화의 생태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태백 야생화 트레킹에서 한 가지 특이한 건 한반도 지천으로 심어진 소나무가 이 숲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안 해설사는 “소나무는 화전민들이 땔감으로 많이 썼고, 그 빈자리에 일본잎갈나무가 심어졌다”고 한다. 태백시 자료를 보면 태백시 전체 면적의 88%가 산림인데, 그중 13%가 일본잎갈나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들어온 일본잎갈나무는 ‘일본’이라는 말 때문에 거부감을 가지는 이도 있지만, 지역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은 기특한 나무라고 칭송한다. 일본잎갈나무는 빨리 곧게 자라는 특성 때문에 탄광 갱도나 철도 침목으로 많이 사용됐다. 안 해설사는 “나무는 그냥 나무다. 다양한 종류의 나무가 많은 숲이 건강하다”고 말했다.
대덕산 정상에서 보이는 풍광. 산 능선과 풍력터빈 등이 보인다. 박미향 기자
이윽고 도착한 분주령. 사람들이 분주하게 다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비는 멈췄다. 대덕산 정상까지 거리는 1.5㎞. 가파른 길이다. 40분이면 닿는 검룡소탐방지원센터로 내려가 트레킹을 마칠 수도 있다. 하지만 산 정상에 핀 야생화는 또 다른 풍모를 자랑할 게 자명할 터. 정상을 향해 가는 동안 발견한 요강나물은 요강을 똑 닮았다. 야구방망이 재료인 물푸레나무는 단단했다. 이 나무로 만든 곤장으로 두 대만 때려도 죄를 실토했다는 옛이야기는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걷다 보면 사람이 친 줄에 매달린 요상한 작은 주머니를 발견한다. 무지막지한 들짐승들이나 멧돼지로부터 야생화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짐승들이 기겁할 향 주머니인 것이다.
드디어 놀멍쉬멍 도착한 대덕산 정상. 파란 하늘에 딱 한 번의 붓질로 그려낸 것 같은 능선들, 그 사이로 눈치 없이 끼어든 운무, 저 멀리 반가워하며 달려온 바람, 그리고 고요. 영화 <그래비티>의 라이언 스톤(샌드라 불럭)이 맞닥뜨린 극강의 우주 고요가 이러했을까. 바닥에 핀 야생화인 범꼬리와 전호를 발견하고서야 이곳이 ‘하늘 아래 첫 도시’임을 다시 느꼈다.
‘한강 발원지’인 검룡소로 향하는 하산 길은 더없이 경쾌했다. 사람의 손이 오히려 닿지 않아 만개한 천국을 만난 기쁨은 크다.
국립공원공단 예약시스템에서 예약은 필수. 사전 예약이 필요 없는 지역도 있다. 검룡소에서 검룡소 분소까지 총 1.5㎞ 거리는 상시개방 구간이다. 해설사 동반 투어도 요청할 수 있다.(문의 033-550-0000)
대덕산 오르는 길에 발견한 요강나물.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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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 땅에 야생화가 있다면, 하늘엔 은하수가 있다. 지금 태백은 은하수 여행하기에 최적기다. 빛 공해가 적은 태백은 국내에서 손에 꼽히는 별 관찰 여행지다.
지난 15일 밤 11시, 태백선수촌에서 함백산 가는 도로변에 도착하자 별 사진 전문가 전제훈(61)씨가 반갑게 맞았다. 그가 은하수 여행안내자로 나섰다. 그의 도움을 받아 은하수 사진 찍기에도 도전해 볼 참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쏟아지는 산기슭 도로. 김영하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의 두 주인공이 차 사고로 처음 만나게 되는 음습하고 운무 자욱한 도로가 저절로 떠오르게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곧 그 모든 불안은 한순간 사라졌다. “자, 봐요. 봐요! 구름이 지나갔으니, 보이죠?” 전 작가가 말한 하늘로 고개를 들자 별 무리 은하수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2~3분 눈을 감았다가 뜨면 동공이 열려 보이기 시작합니다.” 별 사진 찍기의 첫 단추는 눈 감기다.
전씨는 본래 1980년대부터 갱내 화약관리기사로 일한 광부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빛 캐는 광부 사진가’로 더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은하수 사진작가’로도 불린다. 2016년 첫 번째 은하수 사진전을 열었다. 어쩌다 별 사진가가 되었을까.
“1985년부터 태백 함박사진동호회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때는 주로 동료들의 얼굴이 피사체였죠. 나는 광부였으니까요. 주로 기록사진을 찍었어요.” 그의 사진에는 슬픔이 시커멓게 묻어있었다. 지하 갱에서 돌아오지 못한 동료도 있었다. 한동안 트라우마로 일을 그만두기도 했다. 2006년부터 은하수가 앵글에 들어왔다. “은하수는 어릴 때 별 보고 자란 추억이 떠오르지요. 광부들에게 밤하늘 은하수는 깜깜한 막장에서 의지하는 한 줄기 빛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그는 5년 전 정년퇴임을 했다가 경동탄광으로 다시 출근하는 광부가 됐다. 매일 4400m 지하 갱도로 내려간다. “마지막 광부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그를 따라 카메라 삼각대를 폈다.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대각선 모양의 빛무리 은하수가 보였다. 하지만 초점이 맞춰지지 않았다. 느린 셔터 속도로 찍으면 별 궤적만 찍힐 것이다. 또렷한 은하수 사진을 남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카메라 조리개를 최대한 여시라. 조리갯값을 f2나 f2.8로 세팅하고 감도(IOS)는 3200에, 셔터 속도는 20~30초로 하면 됩니다.” 초점은 오토포커스(AF) 기능을 사용하지 말고, 매뉴얼포커스(MF) 선택한 뒤 렌즈 구경을 돌려 무한대에 맞추면 된다고 그가 알려줬다.
모든 일에 때가 있듯이 은하수도 관찰할 수 있는 시간대가 따로 있다. 국내에서 은하수를 관찰할 수 있는 시기는 3~9월인데, 매달 은하수가 출현하는 시간이 달라진다. 3~5월은 새벽 2시부터 여명 때까지, 6~8월은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 2~3시까지 볼 수 있다. 요즘 여행 철을 맞아 은하수 여행 동반 요청이 태백시를 통해 자주 들어온다고 그는 말한다.
태백시가 추천하는 주요 은하수 관찰지는 7곳이다. 오투전망대를 비롯해 은하수 보기 좋은 5곳이 포함된 함백산 은하수길(1312m), 오투리조트(996m), 스포츠파크(812m), 오로라파크(686m), 탄탄파크(742m), 구문소(540m), 태백산 당골광장(865m) 등이다.
태백/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