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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편지 한 통이 있다. 제목은 <206: 사라지지 않는>, 수신자는 1928년 밀양 출생 김말해. 그러나 그는 2019년 세상을 떠나고 없다. 이 편지가 그에게 도달할 수 있을까?
1950년 한국전쟁이 나자마자, 스물세살 말해는 스물여섯살 신랑과 생이별을 했다. 일제의 ‘처녀 공출’을 피하기 위해 만나 결혼한 남자와 두 아들을 낳고 서로 의지하며 살았더랬다. 하지만 “보도연맹 교육이 있으니 시내로 집합하라”는 경찰의 소집장을 받고 나간 남편은 그 이후로 돌아오지 않았다.
말해가 남편의 소식을 듣게 된 건 그로부터 10년 후.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다음이었다. 남편은 “집에서 멀지 않은 어느 산골짜기, 밥그릇처럼 파인 땅속”에서 수많은 뼈 뭉치들과 함께 나타났다. 남편이 묻힌 자리에 가 본들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수많은 ‘남편들’의 “살은 전부 다 썩어서 없고, 젊을 때 가서 죽었으니, 이만 하얬다.” 말해의 남편은 ‘보도연맹 사건’으로 알려진, 한국 정부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의 피해자였다.
하지만 말해는 오랜 세월 ‘유가족’이라는 이름을 갖지 못했다. 오히려 ‘빨갱이의 아내’라고 손가락질당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때문이었다.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박정희 정권은 ‘보도연맹 사건’을 인정하지 않았다. 국군이 누군가를 죽였다면, 그는 반드시 빨갱이여야만 했다. 피해자 유해 발굴을 진행하던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의 활동은 물거품이 됐고, 진상 규명을 요구하던 한국전쟁유족회는 이적단체로 내몰렸다.
그렇게 ‘국가가 보호하고 개도하는 전향자 명단’(보도연맹)에 이름이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한 이들의 억울함은 다시 땅속에 파묻혔다.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아도 10만명. 10만명의 죽음은 없었던 일처럼 지워졌다. 말해의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말해는, 살았다. 농사를 짓고, 두 아들을 키우며, 그 세월을 악착같이 살아냈다.
말해의 인생에 징글징글한 ‘개손’(공권력)이 다시 등장한 건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2010년대. 송전탑을 짓겠다며 밀양 상동면 도곡리에 한전이 밀고 들어왔을 때다. 나고 자라 평생을 뿌리내렸던 땅에 76만5천볼트의 송전탑이 들어섰다. 시부모가 묻힌 자리에조차 송전탑이 서는 바람에 술 한잔 편히 올릴 수 없게 되었지만, 제대로 된 협의도 보상도 없었다. 말해는 분했다. 그래서 구십 평생 처음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싸웠다. 그때, 그의 앞을 막아서서 곤봉을 휘두른 것이 ‘민중의 지팡이’라는 경찰이었다.
몇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투사 말해’의 곁에서 카메라를 들고 머물렀던 다큐멘터리 감독 허철녕은 생각했다. 말해에게 일본 순사나 한국군이나 경찰이 다 하나의 얼굴인 건 아마도 그가 살아온 삶 그 자체 때문인 모양이라고. 허철녕은 “글을 쓸 수 있었다면 일기를 썼을 것”이라는 말해를 위해 그의 사계절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그것이 <말해의 사계절>(2017)이다.
그로부터 5년 후. 허철녕 감독은 ‘말해 연작’의 다음 작품 <206: 사라지지 않는>(이하 <206>)을 들고 돌아왔다. 2014년부터 시작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 시민발굴단)의 활동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감독은 대한민국이 지워버린 ‘말해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 대한민국의 역사 안에서 이해해보고 싶었다.
다큐는 보도연맹 사건 진상 규명을 둘러싸고 쏟아지는 언론과 정치인의 사납고 모진 말들과 함께 시작된다.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성공의 역사입니다. 왜 과거가 미래의 짐이 됩니까?” 정돈된 말투로 쩌렁쩌렁 울리는 이 한마디는, 어째서 군사독재 이후에도 그렇게 오랫동안 이 죽음들이 땅에 파묻혀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이와 함께 삽 하나가 나타나 옅은 빛이 들어오던 작은 구멍을 흙으로 덮어버린다. 그리고 타이틀 컷.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206개의 뼈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을 담은 다큐의 제목 <206: 사라지지 않는>이 떠오른다.
장면이 바뀌면 시원한 바람 소리와 함께 정성스럽게 흙을 털어내는 소리가 들린다. 다정하고 친절한 얼굴이 화면 위에 등장한다. 시민발굴단의 얼굴이다. 반가워하고,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는, 한마디로 설명되지 않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깊은 눈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이 만남을 모두에게 알리는 경쾌한 종소리가 울린다. 딸랑딸랑딸랑. 우리는 오프닝 시퀀스 내내 유해의 자리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206>은 그렇게 우리를 피해자의 자리로 초대한다. 그건 땅속에 묻혀 있던 이들을 역사의 타자로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진실을 발굴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을 응원하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기도 하다. 피해자의 자리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건 고통과 상실이 아니라, 나를 만나기 위해 정성을 들여온 이들의 따뜻한 마음이다. 이건 놀라운 일이다.
도대체 이런 시선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건 어쩌면 허철녕이 시민발굴단과 함께하면서 배운 태도 덕분일지도 모른다. 시민발굴단은 유해와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는 유해를 ‘한 팀’이자 오랜 세월 버텨준 고마운 동료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한 활동가는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발굴한 해골을 정성 들여 정돈하는데, 흙과 오물들을 다 털어낼 즈음 턱이 ‘쫙’ 하고 벌어졌다고. 그 모습이 마치 나를 향해 웃어주는 것 같아 고마웠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건 시민발굴단이 원통하게 죽은 자들의 망해가 품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206개의 뼈가 땅속에서부터 안고 올라오는 건 미래의 발목을 잡고 세계를 망치는 무언가가 아니다. 그건 우리를 다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인 것이다.
<206>은 뼈의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쓰면서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건 말해를 향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말해 할머니에게”로 시작되는 이 아름다운 편지는 그에게 기어코 도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급진적인 사랑이 반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잘 전달되기를, 기도한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