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강원 고성군에 있는 워크앤스테이 ‘맹그로브 고성’ 1층 워크라운지에서 조서형 객원기자가 안마의자에 앉아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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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커피 두잔을 차에 싣고 서울~양양 고속도로를 통해 도심을 빠져나갔다. 동료와 함께 강원도 고성으로 떠나는 길이었다. 강원도 홍천휴게소에 들러 갓 구운 호두과자 한 봉지를 샀다. 휴갓길 여행자의 해방감을 만끽했다.
이번 휴가의 주목적은 ‘일’이다. 숙소 입구에 표시된 일출 시간에 맞춰 오전 5시40분에 눈을 뜬다. 공용 주방에 가서 커피를 내린다. 커피머신이 웅웅 소리를 내며 뜨거운 커피를 만들었다. 소파 자리에 앉았다. 이내 수평선 위로 해가 떠올랐다. 반쯤 남은 커피를 들고 파티션이 있는 책상으로 옮겨 이메일을 몇개 썼다. 오전 9시에는 폰 부스에 들어가 섭외 연락을 돌리고 필요한 통화를 했다. 연이은 섭외 거절에 머리가 무거워졌을 땐 안마의자에 앉아 마사지를 받았다. 고개를 들어 바다를 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긴 오전을 지나 점심시간. 추천받은 주변 맛집을 살핀 끝에 고른 메뉴는 가오리찜. 근처 ‘녹원식당’에 들러 대기 번호를 받았다.
기다리는 동안 옆에 있는 ‘북끝서점’에 들러 마음에 드는 책 두권을 샀다. 숙소로 돌아와 빨래를 돌려놓고 파도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40분 동안 낮잠을 잤다. 오후 업무를 마무리하고 저녁에는 근처 횟집에서 자연산 모둠회를 먹었다. 저녁 8시부터 화상회의를 했다. 1시간45분 회의를 마치고 베란다로 나왔다. 냉장고에서 탄산수를 꺼내 마셨다. 긴장했던 마음이 파도 소리에 휩쓸려 시원하게 사라졌다. 뜨거운 물로 씻고 하얀 새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잘 마른 침구에 몸을 묻으니 이른 시간부터 잠이 왔다. 다음날에도 같은 시각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어제 산 책을 읽었다. 점심 식사로는 곤드레밥과 톳밥을 시켜 나눠 먹었다. 오후에 동료는 근처 산에 다녀왔고 나는 숙소에서 업무를 마무리했다.
맹그로브 고성 이용자들이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한 뒤 테라스에 나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지난 4월20일부터 23일까지 워크앤스테이 ‘맹그로브 고성’에서 보냈다. 서울에서 떨어진 곳에 나를 밀어넣고 마음 편히 업무 시간을 늘렸다. 밀린 빨래를 해치운 것처럼 개운했다. 같이 간 동료는 평소 도시에서 할 수 없던 휴식을 마음껏 즐겼다. 바닷가를 산책하고 숲을 걸어 올랐다.
대한민국은 업무 강도가 세다. 2016년에 한국인은 평균 2069시간을 일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두번째로 길었다. 법률을 정해놓고 근로시간을 줄이려 애썼지만 2021년에도 우리나라 연평균 노동시간은 1915시간이었다. 멕시코, 코스타리카, 칠레 다음이다. 최근 10년 동안 ‘힐링’, ‘욜로’, ‘소확행’ 등 워라밸을 향한 열망만 있었지 방법은 언급되지 않았다. 강원도 고성에서 지내며 그 힌트를 얻었다. 여기선 노트북을 덮는 순간 휴가가 시작되고 바다를 산책하며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일이 가능하다.
워케이션(workation)은 일(work)과 휴가(vacation)의 합성어다. 일을 하면서 휴가를 즐기는 근무 형태로 미국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직원들이 시작했다. 그들은 며칠에서 몇달 동안 캘리포니아와 네바다의 경계선에 있는 시에라네바다산맥에 위치한 대형 담수호이자 인기 휴양지인 타호 호수 근처에서 지냈다. 낮엔 일하고 일과 후엔 스키나 하이킹 같은 아웃도어 라이프를 즐겼다. 회사는 숙박·교통 비용을 지원했다. 직원은 연차와 돈을 쓰지 않고 휴가를 보내서 좋고, 회사는 젊은층의 선호를 반영해 업무 능률을 향상시켰다. 우리나라에서도 코로나19 기간 동안 원격근무가 가능함을 경험하면서 근무 형태가 다양해졌다. 워케이션은 웰니스 추세와 결합돼 새로운 관광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맹그로브 고성은 올해 3월24월 공유주거 브랜드 ‘맹그로브’에서 오픈한 ‘워크앤스테이’의 첫번째 지점이다. “10년 전부터 노마드 워커가 늘었는데 숙소 개념은 크게 변하지 않았어요. 여행자가 일할 수 있는 공간은 여전히 부족했죠.” 워크앤스테이 운영팀 박찬빈(33) 팀장이 ‘기획 동기’를 설명했다. 맹그로브 고성은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교암리의 작은 해변을 앞에 둔 4층 건물이다.
1층에 업무 공간, 2~4층에 개인 공간이 마련돼 있고, 공용 공간으로 주방과 세탁실이 있다. “확 트인 자연을 조망할 수 있는 장소를 고민했어요. 동시에 생활 인프라가 갖춰져 있고 서울을 기준으로 이동시간이 3시간이 넘지 않는 곳을 찾았죠. 그게 딱 고성이었어요.” 여기선 차가 없이도 얼마든지 걸어서 주변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그보다 먼 곳으로 나가는 경우엔 자전거 대여 서비스를 이용하면 된다. 개장한 지 한달. 반응도 좋다. “텐션이 유지되어 좋대요. 쉼이 필요해 여행지에 왔지만 너무 퍼지고 싶진 않은 거죠. 워케이션은 템포를 적당히 늦춰줘요. 평소처럼 일을 하면서도 바다와 산 같은 자연이 가까워 마음이 편안해져요.”
나와 동료가 나흘 동안 묵은 맹그로브 트윈룸은 1박에 16만원부터이고, 주방까지 갖춘 스위트룸은 19만원부터다. 책상과 냉장고가 없는 4인실 도미토리의 가격은 5만원부터다. 사진작가인 동료 손동주(38)씨는 이번 워케이션 투어를 통해 ‘이완’을 느꼈다고 했다. “맹그로브 고성에서 가장 좋은 점은 채광이었어요. 시간에 따라 빛의 위치와 색이 달라지는 걸 볼 수 있어 좋았어요. 첫날 도착했을 땐 자전거가 있는 입구의 벽이 예뻤고, 아침에는 주방으로 들어오는 빛이 멋졌어요. 제가 일하는 서울 강남구의 스튜디오는 지하라 빛을 볼 일이 워낙에 없거든요. 게다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그 생김새나 색깔 같은 건 감상할 기회가 없어요.” 그는 집에서 두 아이를 돌보며 소설가로 일하는 친구를 떠올렸다. “가족은 가장 사랑하는 존재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치기도 하잖아요. 워케이션을 오면 주변에 챙기고 신경 써야 할 것들로부터 벗어나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어요. 집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특히 추천하고 싶네요.”
‘네카라쿠배당토’(네이버, 카카오, 라인, 쿠팡, 배달의민족, 당근마켓, 토스)라 불리는 정보통신기술(IT) 기업을 필두로 회사들은 본격적으로 직원들의 워케이션을 지원하고 있다. 토스를 운영하는 비바리퍼블리카는 경남도 등과 협업해 남해군에 워케이션 일터(남해군 양아 바다 힐링센터)를 설립했다. 폐교된 분교를 리모델링해 1층에 업무 공간, 2층에는 객실을 갖췄다. 네이버는 강원도 춘천에서 4박5일의 원격근무를 지원하고, 엘지(LG)유플러스와 롯데멤버스는 각각 경기도 광주의 리조트, 제주도 롯데호텔을 직원들에게 워케이션 용도로 제공한다. 숙박 예약 플랫폼 ‘야놀자’는 지난해 강원도 평창군을 시작으로 강원도 동해시와 전남 여수시에서도 워케이션이 가능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조서형 객원기자가 일을 마치고 트윈룸 숙소의 오션뷰 테라스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 이 숙소에는 두개의 침대와 책상, 미니 냉장고와 화장실이 갖춰져 있다.
여행 상품을 제공하는 스타트업 ‘마이리얼트립’은 아예 1년 내내 워케이션이 가능하도록 했다. 마이리얼트립 사업개발팀의 정지민(33) 매니저는 지난달 타이 치앙마이로 한달 동안 워케이션을 다녀왔다. “가기 전엔 워크면 워크고 베케이션이면 베케이션이지, 워케이션은 별로 좋은 조합 같지 않았어요. 휴양지에서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죠. 남편과 치앙마이의 숙소를 구경하다가 멋진 수영장을 보고 충동적으로 예약했는데 그게 취소가 되지 않았어요. 이 김에 워케이션 체험이나 해보자 싶었어요.” 휴가와 업무가 효과적으로 양립했을까? “아무래도 집에서 업무를 할 때보다는 효율이 떨어져요. 여행지에 온 순간 일을 독보적 우선순위에 둘 수 없게 되니까요.” 그래도 정지민 매니저는 일과 삶이 분리할 수 없는 한쌍이란 걸 깨달았다고 했다.
맹그로브 고성 1층의 ’보이드(빈 공간) 룸’. 바다가 보이는 창과 방석만 놓여 있다. 일하다 쌓인 걸 비워내는 방이다.
“치앙마이에서 난생처음 매일 수영하는 삶을 살아봤어요. 숙소에 수영장이 있으니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도 점심마다 헤엄칠 수 있었던 거죠. 퇴근 후에는 동네를 둘러보고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하고 술을 마시며 긴장을 풀기도 했어요. 세어보니 30일 중 28일은 술을 마셨더라고요. 워케이션엔 긴장과 이완이 함께 있어 즐거웠어요. 일이 있을 때 여행이 더 좋을 수 있단 걸 깨달았어요. 둘은 아무래도 서로를 단단히 지지하는 관계 같아요.” 그에게 다음 워케이션 계획이 있는지 물었다. “내년쯤 호주 케언스나 인도네시아 발리를 생각하고 있어요. 한국과 시차가 맞고 인터넷이 잘되고 물가가 저렴하면서 여행자를 위한 편의시설이 잘 갖춰진 곳을 기준으로 골랐어요.”
워케이션은 지방 소규모 도시의 유입 인구를 늘리기 위한 대안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한국관광공사가 ‘2021 워케이션 포럼’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국내 워케이션의 파급 효과는 직접 지출액 3500억원, 고용 창출 효과 2만7천명, 생산 유발 4조5천억원으로 추산됐다. 지방에서 인구 1명이 감소하면 이를 대체하기 위해선 1년 동안 숙박 여행객 18명과 당일 여행객 55명이 필요하다. 워케이션으로 장기체류 관광객을 유치하면 지방의 인구 감소를 보완할 수 있는 것으로 기대된다. 이에 따라 지방자치단체도 워케이션 상품을 적극 유치하고 있다. 강원도관광재단은 지난해 6월과 10월, 영월·양양·태백·삼척에서 1천여명이 참여한 워케이션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경남 하동군에서는 한옥 숙박시설에서 일을 하며 농어촌 체험을 할 수 있는 직장인 체류형 관광프로그램 ‘오롯이 하동’을 운영하고 있다. 부산에서도 거점센터와 여행 플랫폼, 숙박시설을 결합한 ‘부산형 워케이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짐을 맡길 수 있는 사물함과 유료로 대여할 수 있는 자전거.
오전 9시 워크라운지 밖에서 바라본 내부 모습. 이용자들이 업무를 시작했다.
글 조서형 객원기자
사진 손동주 스튜디오 103 실장
강릉에서 제주까지
우리나라에서도 갖가지 형태의 워케이션 공간이 늘고 있다. 어느 지역, 어떤 환경에서 일과 휴식을 병행할지 선택지도 넓어졌다는 뜻이다. 전국의 워케이션 공간을 정리했다.
강릉 ‘일로오션’
로컬 스타트업 ‘더웨이브컴퍼니’와 공유 사무실 ‘파도살롱’이 함께한다. 자연 속에서 일하며 쉴 수 있도록 해변 사무실과 호텔 숙소를 제공한다. 업무용 사무실로는 강원 강릉시 송정동 아비오호텔 1층 로비에 해변 뷰로 조성된 ‘파도살롱 송정점 오피스’와 강릉 도심의 ‘파도살롱 명주점 오피스’ 두곳이 있고, 숙소는 이 호텔 객실을 사용하면 된다. 숙소 앞 솔숲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일할 수 있도록 파워뱅크(캠핑용 대형 배터리), 포켓 와이파이, 캠핑 책상과 의자·담요 등이 담긴 ‘리모트워크 키트’를 빌려준다.
공주 ‘로그인 공주’
숙소, 공유 사무실, 마을 웰컴 키트와 네트워킹 프로그램이 포함돼 있다. 충남 공주 원도심에 있는 공유 사무실 ‘업스테어스’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하숙집 형태의 숙소 ‘버드나무빌’에선 교육도시로 유명했던 공주의 하숙 문화를 경험할 수 있다.
제주 ‘오피스’(O-PEACE)
자유로운 도시인을 위한 워케이션 공간. 도시에서 번아웃을 경험한 이들이 평화로운 삶을 위해 제주로 이주해 만들었다. 제주 동쪽 마을에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공간을 만들었다. 한달살기 또는 장기 투숙을 하며 일하는 여행자들에게 평화로움과 몰입의 시간을 선물한다. 제주시 조천읍과 대정읍, 두 지점이 있다.
양양 ‘데스커 워크 온 더 비치’
가구 브랜드 ‘데스커’에서 강원 양양의 휴양지에 마련한 업무 공간. 일룸의 가구로 구성된 숙소와 데스커의 베스트셀러인 모션데스크가 놓인 코워킹 스페이스가 특징이다. 요일별로 커뮤니티 라운지에서 커피 브루잉, 조향, 수제 맥주 제조, 요가 같은 원데이 클래스가 무료로 진행된다. 양양의 서프스쿨과 제휴를 맺어 서핑 강습과 렌털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게 했다. 데스커 멤버십 회원과 기업을 대상으로 한다. 2022년 기준 77개 기업에서 559명이 참여했다.
곡성 ‘러스틱 타운’
전남 곡성군 심청 한옥마을의 팜앤디 협동조합에서 진행한다. 한옥의 숙소에서 머무르며 자연이 눈에 들어오는 사무실에서 일한다. 일과를 마친 뒤에는 전통주 클래스와 야생차 체험 등 이 지역의 문화와 교류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5인 이상의 기업 고객만 예약할 수 있다.
조서형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