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의 유서 깊은 도시 족자카르타(욕야카르타)와 제2의 도시 수라바야 답사에서 산재한 유적지로 이동하려면 자동차를 대절해야만 했다. 답사 일정은 빠듯한데 대중교통은 열악하고, 택시를 타자니 매번 요금 흥정도 번거롭기 짝이 없는 탓이다. 차를 대절하면 기사가 종일 운전을 해주는데 차 주인인 경우가 많다. 자기 차로 영업하는 셈이다. 하루 단위로 대절하므로 부지런하고 기력만 넘친다면 시간과 거리에 구애됨 없이 과하지 않은 요금으로 답사할 수 있다. 한낮의 땡볕을 피해 새벽 4시께부터 움직여도 된다. 먼 거리를 이동하다 보면 늦은 시간까지 차를 타게 되는 일도 잦아 조수석에선 미안한 마음에 좌불안석이지만 운전석에선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물론 지방에서 누리는 대절 차의 ‘호사’는 시간과 돈이 아주 넉넉하지 않다면 수도 자카르타에선 통하지 않는다.
음식 배달 서비스 ‘그랩푸드’ 광고 화면. 그랩 제공
길거리를 오가다 지나는 택시를 불러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는 곳은 몇몇 대도시를 제외하면 별로 없다. 유럽이나 동남아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2010년 미국에서 우버가 개발됐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전세계로 퍼졌다. 급격하게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으며 퍼져나간 우버가 맥을 못 춘 곳이 바로 동남아다. 우버보다 2년 늦은 2012년에 서비스를 시작한 그랩 때문이다. 쉽게 그랩을 동남아의 우버라고 말할 수 있지만 동남아에서 우버는 아예 존재 의미가 없다. 우버는 동남아에서 서비스를 시작했다가 별 성과 없이 2018년에 그랩에 합병됐으니 동남아 시장을 넘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카카오 택시가 2015년에 시작된 것에 비하면 그랩이 상당히 빨랐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택시가 상대적으로 편의성이 높아서 이와 같은 공유 서비스의 수요가 낮았기 때문이다.
그랩은 말레이시아의 앤서니 탄과 후이링 탄이 만든 마이택시(MyTeksi)라는 모바일 앱에서 시작됐다. 하버드대 비즈니스 스쿨에 재학하던 탄은 일종의 콜택시 개념으로 앱을 만들었다가 이를 확대 발전시켰다. 당시 겨우 20대이던 탄도 그랩이 초국가적 앱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현재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타이, 필리핀 등 동남아 8개국에서 그랩이 통용된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지역에 따라 이용이 불편한 곳도 있다. 그랩은 우버처럼 신용카드 결제가 아니고 현금 결제를 한다. 동남아에선 신용카드 이용자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현금 결제라지만 그랩 이용자는 앱으로 예약할 때 요금이 나오기 때문에 바가지를 쓸 우려도 없다.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동남아 많은 지역에서 이동 거리에 따라 요금이 매겨지는 건 별 의미가 없다. 미터기가 있어도 흥정해서 요금을 정하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그랩을 이용하면 흥정하느라 실랑이할 필요가 없다. 현지인도 그랩을 반긴 이유다.
시쳇말로 대박을 치자, 그랩은 택시·그랩카·그랩바이크 등 서비스를 추가했고, 슈퍼마켓과 연동하여 식료품과 생필품을 배달하는 그랩그로서리, 음식을 배달하는 그랩푸드로 다변화를 꾀했다. 그랩그로서리는 서비스 지역에 따라 그랩마트나 그랩슈퍼마켓 등으로 다르게 불리지만 기본적으로 생필품 배달이라는 점은 같다. 그랩은 동남아 각지에서 이렇게 널리 이용된다. 동남아 현지를 낙후된 곳이라 인식하지만 모바일에 기반한 다양한 서비스는 우리나라와 별다를 게 없다. 오히려 우리보다 휴대폰 앱을 더 많이 쓰는지도 모른다. 그랩은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 미국 나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한 여성이 물건을 산 뒤 고젝의 고페이로 결제하는 모습. 고젝 제공
그런데 동남아에서 유독 그랩이 맥을 못 추는 나라가 있다. 인도네시아다. 인도네시아는 그랩이 출발한 말레이시아와 언어와 풍습이 비슷하지만 그랩보다 고젝 이용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본디 동네에서 가까운 거리를 태워주던 영업용 오토바이를 오젝이라 한다. 이를 우버처럼 모바일 서비스로 개발하여 고젝이라 이름했다. 오토바이 택시인 셈이다. 고젝은 특히 자카르타에서는 안성맞춤 서비스다. 교통 체증이 매우 심각해서 거리를 꽉 메운 채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차량 대열을 보고 있노라면 설사 이방인이라도 차에서 내려 오토바이에 올라타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물론 고젝이 인기를 끌면서 자카르타 시내는 녹색 점퍼와 헬멧을 쓴 고젝 오토바이 행렬로 가득해지기는 했다.
고젝의 창업자 나딤 안와르 마카림 역시 하버드대 비즈니스 스쿨 출신이다. 2009년에 고젝을 창업했으니, 그랩보다 출발은 빨랐다. 고젝 역시 돌풍을 일으켰고, 그랩처럼 고푸드, 고센드, 고마트와 같이 음식과 생필품, 택배 서비스로 영역을 확장했다. 마침내 고젝은 지난해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온라인 쇼핑몰인 토코피디아와 합병하여 고투 그룹이라는 지주회사를 설립했다. 토코피디아는 방탄소년단 멤버들을 계속 자사 광고에 출연시켜 성공적으로 한류를 활용하는 기업이기도 하다.
그랩이나 고젝이나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여러 분야를 온라인-오프라인으로 연결해주는 생활밀착형 서비스로 성공했다. 둘 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대표 유니콘에서 거대 스타트업인 데카콘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랩이 말레이시아에서 동남아 전역으로 사업을 확장한 반면, 고젝은 주 기반이 인도네시아다. 하지만 나딤은 인도네시아에 집중한 것이 고젝의 성공 비결이라고 말한다. 생활밀착형 서비스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그랩과 고젝이 추진한 것은 온라인 결제 시스템이다. 고젝은 고페이를, 그랩은 그랩페이를 내세웠다. 양쪽 다 중국의 알리페이처럼 정보무늬(QR코드) 방식이다. 그랩페이는 현금을 충전해서 쓰는 방식이고, 고페이는 지역에 따라 충전방식과 신용카드 등록을 통한 간편결제를 병행한다. 그랩페이는 최근 그랩에 소속된 운전기사와 배달기사에게 보험과 대출 상품 등 금융의 다른 영역까지 확대했다. 말하자면 앱을 이용한 택시에서 핀테크를 활용한 금융으로 진화 중인 셈이다.
서민들에게 은행으로 대표되는 금융의 문턱이 높다는 점은 동남아 경제의 특징 중 하나다. 은행계좌가 없는 사람이 70%에 이를 정도다. 신용카드는 말할 것도 없다. 금융자본주의의 기준으로 볼 때 동남아의 금융화 수준이 낮고 불확실한 것이다. 그런데 그랩과 고젝처럼 공유경제에서 시작된 정보기술(IT) 기반 금융서비스가, 국가의 인가를 받은 은행들이 예금과 대출을 전담하는 전통적인 금융의 판을 바꾸고 있다. 그랩과 고젝 등 동남아식 핀테크의 확장성과 미래 가치를 높이 치는 이유다.
그 핵심은 사업을 꾸린 지 불과 10년 남짓한 스타트업들이고, 20대 창업자들이 추동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선진 금융의 관점에서는 저개발 상태라 할 동남아에서 빠르게 금융 혁신이 진행 중이다. 여전히 빈부 격차가 심하고, 곳곳에 갈등이 숨어 있지만 젊은 세대가 주도하는 디지털 혁신이 금융 소외를 해소하는 하나의 돌파구로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변화의 주역들은 단지 나이만 젊은 것이 아니라 실력과 능력, 자신감도 충만하다는 평을 받는다. 거칠 것도 없고, 꺼릴 것도 없는 전형적인 엠제트(MZ)세대 기업가이다. 한국에서 ‘동학 개미’라 한다면 인도네시아에서는 ‘적도 개미’라 불리는 젊은 주식투자자도 확연히 증가하고 있다.
전세계가 코로나 팬데믹 3년차에 들어섰다. 동남아 사회와 경제에서도 팬데믹의 그늘은 짙다. 하지만 지구적 위기 속에서 동남아에서 디지털 거래와 비대면 이커머스를 가능하게 하는 스타트업들은 오히려 빠른 성장세를 보인다. 이들은 운송, 전자상거래, 물류·배송 등에 아이티 기반 금융서비스를 결합한 핀테크 부문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는 중이다. 미국 아마존웹서비스와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모두 인도네시아에 데이터센터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향후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에 기반을 둔 사업의 포석으로 기본적인 데이터댐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각종 데이터를 저장하는 클라우드 서비스에서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는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성장 잠재력도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경영컨설팅 회사인 매킨지는 아시아에서의 디지털 결제 수익이 전세계 수익의 절반에 이른다며,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디지털 결제의 증가로 그 수익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전통적인 물류와 금융의 강자 싱가포르가 동남아에서의 흐름을 선도하고 있다. 2020년 싱가포르 핀테크 페스티벌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기존 금융 인프라 위에서 핀테크와 디지털 금융으로의 전환을 선도하겠다는 의지를 뚜렷이 했다. 본사를 싱가포르로 옮긴 그랩은 2019년 싱가포르 이동통신사인 싱텔과 합작하여 그랩 파이낸셜 그룹을 만들었다. 싱가포르에서 성공적으로 디지털 은행을 운영하게 된다면 그랩이 강점을 지닌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으로의 확대는 시간문제다. 고젝 역시 인도네시아 현지 은행을 사실상 인수하여 기존의 전통적 은행을 통한 사업 확장 방식으로 디지털 은행을 추진 중이다. 이들이 운송 스타트업에서 시작해 핀테크를 앞세워 디지털 금융의 공룡이 되어가는 과정은 초고속 압축성장의 사례라고 해도 무방해 보인다. 자본주의의 꽃은 금융이라 하지 않던가?
차량 공유업체 고젝의 라이더와 승객. 고젝 제공
열악한 경제·사회적 인프라에다 극심한 빈부 격차와 종교 갈등, 구체제의 관습, 전통으로 인한 모순들을 단박에 건너뛰는 아이티 기술 ‘앱’에서 이처럼 혁신적 변화가 시작됐다는 점은 흥미롭다. 공유경제라는 명분을 앞세워 열악한 대중교통 시스템 속에서 이용자에게 편의를 제공한 그랩과 고젝은 동남아에서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고, 물류와 배송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금융의 문턱을 낮추는 긍정적인 사회 혁신의 동력이 되고 있다. 금수저와 흙수저의 공생이 디지털 경제를 견인하는 셈이다. 물론 이 변화가 지구적 과제이기도 한 ‘플랫폼 노동’의 확산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사실을 외면하기는 힘들지만 말이다.
디지털을 통한 혁신과 압축성장의 활력이 다른 지역보다 동남아시아에서 훨씬 높다. 젊은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에서도 신세대 디지털 혁신가의 대두는 동남아의 무한한 성장 잠재력을 예견하게 한다. 기성세대의 불합리하고 견고한 사회체제를 뛰어넘을 힘이 동남아에 내재되어 있다면 그것은 젊은이들의 편견 없는 문화적 개방성과 디지털 접근성에서 나올 것이다. 애초 동남아의 역사와 문화, 사회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한 ‘랜선 동남아’ 역시 ‘온라인으로 접속한 동남아’가 아니었던가? 동남아시아는 역사적으로 유구하고, 문화적으로 다채로우며, 사회적으로 복잡하다. 그리고 동남아는 젊다. <끝>
*그동안 ‘랜선 동남아’를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