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온다습한 동남아시아의 기후조건은 벼 재배에 안성맞춤이다. 게티이미지뱅크
흔히들 무슨 일을 시작하려면 종잣돈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종잣돈은 말 그대로 종자를 사기 위한 돈이다. 이때 종자는 벼 종자를 가리킨다. 좋은 품종의 볍씨를 사기 위해 농민들에게 종잣돈이 필요했던 데서 기인한 말이다. 종잣돈이 대거 필요했던 때가 있었다. 1970년대 소위 녹색혁명 때이다. 벼 수확이 좋지 않았던 1970년경 한해 벼 수입액이 2억달러가 넘었다. 1966년 박정희 정부는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IRRI)와 공동으로 통일벼라는 새 품종을 개발했다. 이때만 해도 필리핀이 우리보다 잘살았던 때다. 정부는 수확량이 월등히 높은 통일벼를 심도록 강권했다. 갑작스레 새로운 벼를 사야 했던 농민들에게 어느 때보다 종잣돈이 필요했던 건 당연지사였다. 더욱이 인디카종과 교배한 통일벼는 추위에 약했다. 못자리를 덮을 비닐도 사야 했으니 종잣돈은 더 필요했다. 보릿고개를 겪던 시절, 농업생산량을 확 올려주긴 했지만 통일벼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쌀알이 짧고 통통한 자포니카 종자인 경기미나 추청을 선호하는 우리 입맛에 푸석푸석한 통일벼는 안 맞았다. 가정집 대신 대량급식이나 저렴한 식당으로 팔려간 신세에다 품질 평가도 좋지 않으니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보람도 없이 통일벼 시대는 1990년대 서서히 막을 내렸다.
우리는 찰기가 있는 끈끈한 밥을 좋아한다. 낱알이 입안에 알알이 흩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쌀밥은 안남미(인디카쌀)라고 무시하는 게 보통이다. 오랜 농경의 역사를 지닌 민족이지만 쌀밥을 배불리 먹은 게 오래되지 않았다. <흥부와 놀부>의 흥부네가 노래하듯 “이팝에 고깃국”이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뱃속에 들어가면 오래 남아 있는 끈끈한 자포니카종 쌀을 최고로 친다. 하지만 동남아처럼 무덥고 습한 지역은 오래 소화를 시켜야 하는 자포니카종 쌀이 맞지 않는다. 동남아야말로 주식이 쌀이고, 주요 농작물도 쌀이지만 대부분 인디카종이다.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쌀로 정평이 난 쌀들은 인디카종인데, 고유의 향기가 있는 쌀이 우위를 점한다. 우리는 쌀 냄새에 민감한 편이고, 냄새가 안 나는 쌀을 좋은 쌀로 치지만 말이다. 동남아는 쌀이 흔하고 값이 싸지만 비싼 쌀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가격이다. 전세계에서 비싼 쌀로 손꼽히는 것이 타이(태국)의 재스민 라이스인데, 값이 천차만별이다.
타이에서 재배하는 낱알이 길쭉한 쌀을 보통 재스민 꽃향기가 난다고 해서 재스민 라이스라 부른다. 원래 타이 홈 말리(Thai hom mali), 혹은 카오 독 말리(khao dawk mali)라 일컬은 것을 재스민 라이스라고 번역한 것이고 우리식으로 말하면 ‘향미’라는 뜻이다. 타이 사람들은 이 쌀을 찰진 다른 쌀과 구분하여 카오 수아이(khao suai)라고 부른다. 아름다운 쌀이란 뜻이다. 쌀이 얼마나 마음에 들면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전 국민이 애호하는 향미를 만들기 위해 타이에서는 1950년부터 왕실연구소를 비롯한 70여개 연구소에서 집중적으로 쌀 품종을 연구·개발·개량하여 현재 1천 가지가 넘는 다양한 인디카 품종 쌀을 생산하고 있다. 특히 재스민 라이스는 향긋한데다 꼬들꼬들하고 찰지다. 한때는 재스민 라이스가 타이 쌀소비량 10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였다고 한다.
자포니카종(왼쪽)과 인디카종 쌀. 강희정 제공
아시아인의 주식인 쌀의 세계 최대 생산국은 어디일까? 1위가 중국, 2위가 인도이다. 인구가 많으니 쌀 생산과 소비량도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면 3위는 어디일까? 타이도 쌀 수출을 많이 하지만 역시 국토가 넓고 인구가 많은 인도네시아가 3위이다. 2019년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쌀을 소비하는 나라 10개국 중 무려 5곳이 동남아시아 국가이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타이, 미얀마 순이다. 쌀 소비량이 절대 인구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아시아 국가 대부분 주식이 쌀밥이기도 하지만 베트남의 경우에는 쌀로 국수를 만들고, 라이스 페이퍼나 과자류도 만들기 때문에 인구에 비해 쌀 소비량이 많다.
사실 벼농사는 환경친화적이라 보기 어렵다. 벼라는 작물은 기본적으로 경작 기간이 길고, 따뜻한 곳에서 자라며 물을 좋아한다. 즉, 열대 저습성 작물이라 일조량이 많고, 강우량이 풍부해야 농사가 잘된다. 그러니 고온다습한 동남아의 기후조건이 벼 재배에는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벼가 스스로 생육에 좋은 환경을 찾아가 쑥쑥 자랄 리는 없다. 원래 야생에서 자라던 벼를 인류가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약 1만년 전부터라고 한다. 벼농사가 더운 기후와 많은 강수량을 가진 아시아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장미 인디카종 벼는 기원전 5500년께 인도로, 기원전 4000년께에 동남아시아로 퍼졌다. 쌀이 주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그 수요도 점점 높아지고, 벼농사도 보편화했다.
기온이 높은 동남아시아에서는 벼가 쑥쑥 자라니 이기작, 삼기작, 때로 사기작도 가능하다. 같은 땅에 다른 작물을 심는 것을 이모작, 같은 작물을 심는 것을 이기작이라 한다. 사실 벼는 단위 면적당 얻을 수 있는 수확량이 아주 많은 작물이지만 동남아시아의 인디카 생산성은 중국, 한국의 자포니카 생산성보다 떨어진다. 같은 논에서 이기작을 하면 피도 많아지고, 벼 자체의 생산성이 낮아진다고 한다. 벼는 엄청나게 물을 먹어댄다. 논이 항상 물로 가득한 이유다. 건기와 우기가 분명하게 나뉘는 동남아 대륙부도 의외로 건기에는 물이 모자란다. 벼농사를 지을 때는 조금이라도 가물면 농사를 망치기에 십상이다. 습하고 비가 많은 동남아도 물을 모아 농경지에 물을 공급해야 했다.
대표적인 동남아의 관개시설이 바로 캄보디아의 바라이다. 지금은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 앙코르와트 주변에서 매우 넓은 저수지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사실 크메르 제국 시기에 만든 관개용 저수지다. 크메르 제국의 세번째 왕 인드라바르만 1세(재위 877~889)는 처음으로 바라이를 건설한 인물이다. 이때부터 크메르 제국에는 바라이 건설이 활발해지고, 1년 내내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함으로써 벼 생산량이 많이 증가했다. 먹을 쌀이 늘어나니 사람들이 모여들고, 나라는 부강해졌다. 지금은 캄보디아가 세계 극빈국 중 하나지만 크메르 제국 당시는 동남아 대륙부를 호령하던 강국이었다. 대륙부에서 패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막대한 쌀 생산에 힘입은 바 크다. 동남아처럼 인구가 적은 지역은 곧 사람이 힘인데, 쌀 생산이 비약적으로 늘어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이들이 바로 막대한 노동력과 전투력을 제공함으로써 크메르는 대륙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크메르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좋은 사례였던 셈이다.
캄보디아만이 아니다. 동남아 지역이 아무리 벼가 좋아하는 무덥고 습한 최적의 환경이라지만, 거기에 더해 농업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계단식 논도 좋은 예이다. 필리핀 루손섬의 이푸가오주 산등성이에 조성된 장대한 계단식 논 바나우에(Banaue)는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의지의 산물이다. 계단식 논은 한국에도 있지만 동남아의 계단식 논은 상당히 높고 가파른 산비탈에 만들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산등성이를 계단처럼 깎아 바닥을 다지고 논을 만든 뒤 테두리에 돌이나 진흙으로 논두렁을 만든다. 산꼭대기에서 물을 끌어와 계단식 논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게 해서 논 전체에 고르게 물을 댄다. 끝없이 이어지는 등고선 같은 바나우에의 논은 보기에도 장관이지만 인간의 강고한 의지와 지난한 노동을 상징하는 뭉클한 장면을 연출한다. 산의 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라 논의 폭이 들쭉날쭉해서 소가 쟁기질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기계를 쓸 수도 없다. 그러니 계단식 논에 적합하게 벼의 품종을 개량하는 편을 택했다.
인도네시아 발리의 수박(Subak)도 대표적인 계단식 논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바나우에는 1995년, 수박은 2012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다. 사람이 살 것 같지도 않은 높은 산등성이에 층층이 만든 논 사이로 야자수가 늘어진 풍경은 상당히 이국적이다. 계단식 논을 소유한 발리 농부는 수박 커뮤니티의 회원이 될 수 있다. 회원은 농업용 물을 공동 관리하고 자기 논에 물을 댈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 수박은 우리나라의 두레 같은 역할을 하는데, 마을 규모에 따라 만들다 보니 현재 발리에는 1000개 이상의 수박이 있다. 한국이나 동남아나 쌀로 살고, 쌀로 죽는다. 좋아하는 쌀이 다를 뿐이다.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