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치디비 아파트 단지에 있는 호커센터. 위키미디어 코먼스
에이치디비(HDB·Housing Development Board)는 싱가포르의 대표적 아파트형 주거다. 싱가포르 거주민 주거의 70~80%를 차지하는 에이치디비는 한국으로 치면 주공아파트에 해당한다. 같은 이름의 ‘주택개발국’(HDB)에서 건설하여 결혼으로 가족을 구성한 거주민이면 누구에게나 수십년의 장기 할부로 분양해주는 주거복지 시스템으로도 유명하다. 싱가포르에 장기 거주하는 한국인들 역시 고급 아파트인 콘도를 빌릴 예산이 부족하면 바로 이 에이치디비를 싱가포르인들로부터 임차하여 거주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넓은 구조와 딸린 옵션들에 만족하지만 단 하나, 주방에 불만을 가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에이치디비 아파트 내부 주방의 크기가 집 전체 규모보다 너무 작거나, 심지어는 없기 때문이다.
에이치디비 내에 주방 시설이 제대로 안 갖춰진 것은 주방이 덜 중요한 공간이고, 집에서 밥을 해 먹는 경우가 적기 때문이다. 1년 내내 더운 싱가포르에서는 집에 냉장고가 있더라도 음식물이 많으면 각종 벌레가 생기기 쉽다. 다른 한편으로는 싱가포르 전역에는 값싸고 다양한 메뉴를 제공하는 호커센터(야외 푸드코트)와 푸드코트가 많다. 아침에는 동네의 호커센터에서, 점심에는 직장 근처의 푸드코트에서, 저녁에는 퇴근하는 길에 쇼핑몰의 푸드코트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것이 싱가포르인들의 일상이다. 에이치디비 아파트, 쇼핑몰, 호커센터 혹은 푸드코트, 이 세가지는 싱가포르인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핵심 요소다.
푸드코트 체인 ‘푸드 리퍼블릭’. 위키미디어 코먼스
싱가포르는 호커센터와 푸드코트의 나라다. 아파트 단지마다 호커센터가, 엠아르티(MRT)라 불리는 지하철역에는 대부분 존재하는 쇼핑몰마다 푸드코트가 들어서 있다. 한 통계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싱가포르 전역에 호커센터가 114곳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말레이식 꼬치구이인 사테로 유명한 뉴턴 호커센터도 있고, 내부에 700개가 넘는 가게를 보유한 차이나타운 상점도 있다. 이러한 호커센터는 현지 주민들의 중요한 음식문화 공간이기도 하지만, 싱가포르를 찾은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해주는 관광상품이기도 하다. 여기에 대부분 쇼핑몰에 입점해 있는 민간 식음료(F&B) 기업 소유의 푸드코트 체인도 많다.
호커센터와 푸드코트에는 중국식, 말레이식, 인도식, 아랍식, 서구식, 한국식, 일본식, 태국(타이)식 등 다양한 가게들이 있다. 심지어 중국식 식당 내에서도 복건(푸젠)식, 광동(광둥)식, 조주(차오저우)식, 객가(하카)식, 해남(하이난)식 등으로 나뉜다. 싱가포르의 시그니처 메뉴인 치킨라이스는 해남인들이 개발한 유명한 해남식 메뉴다. 복건식의 경우 새우탕면이 유명하고, 조주식은 특유의 간장소스로 볶은 면이 일미다. 싱가포르 거주 인도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타밀인들의 로티 프라타는 특유의 고소한 향이 나는 납작한 빵이 중독적이다. 말레이 음식의 대표 선수인 나시르막(백반), 미고렝(볶음국수), 나시고렝(볶음밥)도 빼놓을 수 없다. 각 인종(ethnic)의 독특한 음식문화가 깃들어 있지만 타 인종들도 먹을 수 있도록 개량된 이러한 메뉴들은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는 싱가포르인들을 음식문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뿐만 아니라 까다로운 입맛의 관광객들을 매료하는 역할도 했다. 싱가포르가 미식의 나라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영제국의 대표적 식민 도시였던 싱가포르에는 도시 인프라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해주는 각종 서비스업 종사자(인력거, 대농장 및 광산의 인부, 호커, 점원, 선박 노동자, 창고 노동자 등)가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었고, 그 인구구성은 다수의 중국계, 소수의 말레이계, 인도계, 아랍계 등 다양했다. 이들은 주로 인종별로 모여 살았지만, 일할 때는 서로 섞이는 경우도 많았다. 이때 노동자들을 따라다니며 각종 음식을 제공해주던 이들이 바로 식민도시 싱가포르의 또 다른 명물, 호커(Hawker)들이었다. ‘호커’의 사전적 의미는 행상, 즉 보따리 상인들을 의미하지만, 당시 싱가포르에서 호커는 주로 다양한 인종들로 구성된 노동자들을 따라다니거나 중심가에 좌판을 깔고 각종 음식을 판매하는 이들을 가리켰다.
다만 방역과 위생을 관리해야 하는 식민지 행정 관료들에게 도시 각지를 다니면서 음식을 파는 호커들의 행위는 식재료가 쉽게 상하는 기후 특성상 비위생적으로 여겨졌고, 도시 미관상으로도 그리 아름다운 장면은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중국계의 이주가 급증하면서 자연스레 호커들 역시 급증하였고, 식민지 정부와의 갈등의 골 또한 깊어졌다. 이에 따른 고민은 1965년 독립 이후 공화국 정부로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에이치디비 아파트 단지에 이들 호커를 모아놓고 호커센터를 조성한 것이 그 해결책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이유로 사실 도심이 아닌, 에이치디비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호커센터의 경우 소유와 관리가 대부분 ‘주택개발국’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호커센터가 단순히 다양한 가게를 모아놓은 차원을 넘어 도시 행정의 일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싱가포르 대표 서민 음식인 용타우푸(전골)의 재료. 위키미디어 코먼스
싱가포르 정부가 음식의 판매와 식재료의 관리를 식품 통제의 영역이 아닌, 방역과 위생, 복지 등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는 흔적은 1946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후퇴하면서 다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부터 이미 보이기 시작한다. 1946년 노동부 산하에 설립된 ‘사회복지부’(Social Welfare Department)가 핵심이었는데, 해당 부서가 담당하던 영역이 음식, 주거, 구호, 청소년 복지, 여성이었다. 특히 1942년에서 1945년 사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며 파괴된 도시 인프라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주민들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회복지부에서는 1946년부터 주민들의 영양 상태를 증진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그 핵심은 싸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제공함으로써 만연한 영양실조와 급격히 올라가는 음식값을 잡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46년 6월29일 모든 인종의 노동자들이 모여 식사할 수 있는 ‘대중식당’(People’s Restaurant)이 처음 문을 열고, 접시당 35센트에 음식을 팔았다. 다만 35센트를 낼 형편이 안 되는 이들을 위해 접시당 8센트에 음식을 파는 ‘가족식당’(Family Restaurant)이 개설되기도 했다. 또한 미취학 아동들을 위해 공짜 음식을 제공해주는 ‘아동지원센터’(Child-Feeding Center)가 처음으로 설립되었다. 물론 이러한 단체 식당에서 제공되는 음식은 지금의 호커센터처럼 인종 간 문화에 따른 다양한 메뉴가 아닌 밥, 피시 카레, 돼지고기, 야채 등 간단한 메뉴였다. 다만 이러한 조치가 독립 이후 공화국 시기 싱가포르 정부에 그대로 이어졌고, 인종 구분 없이 한곳에 모여 음식을 공동으로 먹는 기회와 공간을 제공해주었다는 측면에서 호커센터와 푸드코트의 시작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호커센터와 푸드코트의 중요한 차이점은 실외에서 먹느냐와 실내에서 먹느냐에 있다. 호커센터는 주로 도심의 거리나 아파트 단지 내부에 조성되어 외부에서 먹는 형태가 대부분이다. 다만 이 경우 덥고 우기가 존재하는 싱가포르의 기후적 특성으로 인해 위생상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 1980년대 싱가포르의 경제가 성장하고, 거주민들의 평균수입과 삶의 질 역시 높아지면서 가격이 조금 높더라도 좀 더 위생적인 형태의 대중식당에서 식사하고 싶다는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당시 싱가포르 곳곳에 건설되기 시작한 쇼핑몰에 ‘푸드코트’라는 형태의 실내 호커센터가 입점하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푸드코트는 1985년 스코츠 쇼핑센터에 입점한 ‘피크닉’이라는 이름의 푸드코트였다. ‘피크닉’은 쇼핑몰 내에 있어 거주민들이 쇼핑 후에 편하게 접근할 수 있었고, 에어컨이 켜진 쾌적한 환경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호커센터보다는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1990년대 말, 2000년대 들어 이 푸드코트는 다시 한번 변신을 한다. 싱가포르가 관광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전세계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관광지 주변의 푸드코트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메뉴가 입점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로 거주민들을 대상으로 하기에 기존의 인테리어와 메뉴가 그대로 유지되던 호커센터와는 대조적이었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인들을 위한 할랄푸드나 일본인들을 위한 일본식 도시락, 2000년대 들어 증가한 한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한식 코너가 곳곳에 입점하기 시작했다. 또한 중국과의 인적 교류가 깊어지면서 복건이나 광동식이 아닌, 대륙의 중국인들이 주로 소비하는 음식을 판매하는 중식 코너들도 필수적으로 입점하기 시작하였다.
대중식당에서 식사하는 노동자들. 싱가포르 국립기록원 제공
싱가포르는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상대적으로 철저한 방역시스템과 그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 그리고 활발한 백신 보급으로 인해 한국인들이 코로나 이후 가장 먼저 도전할 ‘안전한’ 국외 여행지로 꼽힌다. 지금, 싱가포르로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예비 여행객들 가운데 싱가포르 음식문화의 정수를 맛보고 싶은 이들은 당장 호커센터와 푸드코트를 일정에 넣으라고 권하고 싶다. 추천하자면 필자가 4년 반 동안 거주한 부킷판장 쇼핑몰 옆 에이치디비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에는 싱가포르에서 (아마도) 가장 싸고 맛있는 칠리크랩과 갓 튀긴 번, 시원한 타이거 비어, 입맛 돋우는 모닝글로리(캉콩)를 파는, 현지인들만 아는 호커센터가 있다.
김종호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랜선 여행하듯 흥미롭게 동남아시아의 역사, 문화, 경제를 소개합니다. 40년 동안 동남아시아를 연구해온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와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