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전 서울 중구의 티마크그랜드호텔서 열린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회견에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자리가 마련돼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 피해자가 참석해 사건과 관련해 발언했으나, 언론 노출은 동의하지 않았다. 사진공동취재단
“그분의 위력은 여전히 강하게 존재합니다.”
지난해 7월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숨진 뒤
처음으로 공개석상에서 입을 연 성추행 사건 피해자는 인사말에서 ‘위력’을 7번 이야기했다. 서울북부지검·서울중앙지법·국가인권위원회 등 여러 국가기관에서 거듭 피해 사실을 인정했지만, 여권이 떠밀리듯 사과한 뒤 2차 가해에 손 놓고 있는 현실을 ‘위력의 작동’이라고 꼬집은 것이다. 피해자는 “저의 회복에 가장 필요한 것은 용서”라면서 “잘못한 일들에 대해 진심으로 인정해달라”고 했다. 여권이 보궐선거가 열리게 된 이유인 박 전 시장의 성추행 가해 사실을 명확히 인정하고, 당 차원의 후속 조처를 내놓아야만 ‘용서’와 ‘일상으로의 복귀’도 가능하다고 호소했다.
17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의 한 호텔에서 열린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회견 안내판. 사진 한국여성의전화 페이스북
“이낙연·박영선 사과 진정성·현실성 없어”…‘사실인정·당차원 후속조처’ 요구
피해자는 17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 티마크그랜드호텔에서 열린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피해자가 지원단체 등을 통하지 않고 직접 취재진을 만나 입장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피해자는 기자회견에 직접 나선 이유를 묻자 “저의 피해 사실을 왜곡하고 상처를 준 정당에서 시장 후보가 선출됐다. (선거 뒤) 저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든다”고 답했다. 그는 민주당의 사과가 내용과 형식 모두 잘못됐다고 했다. “이낙연 (전) 대표와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가 어떤 것에 대한 사과인지 명확하게 짚었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며 △피해호소인이라는 명칭으로 피해사실 축소·왜곡 △당헌을 바꿔가며 서울시장 후보 선출 △서울시장 선거캠프 구성 문제 등을 열거했다. 그는 “사과를 하기 전에 사실에 대한 인정과 후속 조치가 있었어야 한다. 지금까지 사과는 진정성도 현실성도 없는 사과였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상임선거대책위원장)는 지난 1월 국가인권위 조사 결과가 나온 뒤 피해자에게 사과의 뜻을 밝혔지만, 사건 초기 자신을 비롯한 민주당 의원들이 피해자를 ‘피해호소인’ 등으로 부른 것에 대한 사과나 해명은 하지 않았다. 현재 박영선 후보 캠프에는 피해호소인 호칭을 쓴 남인순·진선미 의원이 공동선대위원장으로, 고민정 의원이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피해자는 ”피해호소인으로 명명했던 의원들이 직접 사과하도록 박영선 후보가 따끔하게 혼냈으면 좋겠다”고 했다. 피해자는 남 의원 등에 대한 당 차원의 징계도 재차 요구했다.
“인권위 결정 실체적 진실에 가까워…소모적 논쟁 중단해달라”
피해자는 지난 1월 국가인권위원회가 “박 전 시장이 피해자에게 행한 성적 언동이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뒤에도 피해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제는 소모적 논쟁을 중단해달라”고 호소했다.
피해자는 “방어권을 포기한 것은 상대방(박 전 시장)이다. 고인이 살아서 사법절차를 밟고, 스스로 방어권을 행사했다면 조금 더 사건의 진실에 가까워졌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이 상황은 악용하여 저를 비난하는 공격들, 상실과 고통에 공감한다. 그러나 그 화살을 저에게 돌리는 행위는 이제 멈춰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피해자는 인권위의 결정에 대해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 실체적 진실에 가까웠다”고 평가했다. 피해자는 “작년 7월 이후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가 종결될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과 달리 실체적 진실을 밝혀냈다”며 “저의 일방적 주장뿐 아니라 구체적인 증거들, 참고인 진술 등에 비춰서 사실을 인정받았다”고 말했다. 인권위는 직권조사 결과 박 전 시장이 피해자에게 늦은 밤 부적절한 메시지와 사진을 보낸 점, 네일아트를 한 손과 손톱을 만졌다는 점 등이 확인됐다고 밝힌 바 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가 17일 오전 서울 중구 티마크그랜드호텔에서 열린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회견에 참석해 피해자의 메시지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온라인에 떠도는 신상…“잔인한 2차 가해 속 하루하루 버텨”
피해자는 함께 동료로 일했던 서울시청 직원들이 자신을 비방하고, 온라인상에 자신의 신상정보가 떠돌아다니는 것에 대한 고통도 이야기했다.
피해자는 피해 사실을 밝힌 뒤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이 “신상 유출”이라고 말하면서 “(박 전 시장)
지지자들의 잔인한 2차 가해 속에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고 했다. 이날 기자회견은 피해자의 노출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피해자의 인사말은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가 대독했고, 기자회견문 낭독과 질의·응답은 사진 및 카메라 기자들이 퇴장한 가운데 이뤄졌다.
“극단적인 선택으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리가 바뀌었고, 고인을 추모하는 거대한 움직임 속에서 저라는 인간이 설 자리가 없다고 느껴졌다”고 말할 때는 흐느끼기도 했다. 그는 “저의 가족은 저의 신상에 대한 게시물을 신고해서 지워나가고 있다”며 2차 가해에 대한 기준 확립과 제도 지원이 절실하다고 했다.
또 일부
박 전 시장의 비서진들과 지지자들이 자신이 박 전 시장에게 쓴 편지 등을 근거로 피해 사실을 부인하는 것에 대해서는 “제가 일터에서 저의 소명을 다 해 열심히 일했던 순간이, 저의 피해가 없었음을 증명하는 이유로 사용되는 것이 굉장히 유감스럽다”고 했다.
“거대 권력에 즉시 문제제기 가능한 사회 만들어 달라”
정치권을 향해서는 ”거대한 권력 앞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 그 즉시 문제 제기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애초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열리게 된 계기인 만큼 중심 의제가 되어야 할 ‘위력 성폭력’ 문제가 정작 선거국면에서 정쟁에 밀려 잊힌 상황을 비판한 것이다. 그는 “피해자가 조심하는 것이 아닌, 피해자가 좋게 에둘러서 불편함을 호소해야 바뀌는 것이 아닌, 가해자가 스스로 조심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피해자는 향후 계획에 대해 “(제가) 말하는 시기는 오늘이 마지막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제 그분들이 조치하고 행동하셔야 할 때다”라고 밝혔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