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내밀면 닿을 거리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022년 3월6일 토요일, ㄱ씨는 도착한 문자메시지를 열어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문자를 보낸 사람은 직장 동료인 ㄴ씨였다. 한때 ‘연인’이기도 했지만 이미 끝난 사이다. 사귀는 동안 세 차례나 ㄱ씨를 때려 헤어짐을 통보했지만, ㄴ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연인인 듯 행동했다. 나흘 전엔 퇴근길 지하철역까지 따라오더니 “난 샤워하고 졸려~ 곧 잠올 듯 짝꿍도 피곤할 텐데 일찍 쉬구~”라는 문자까지 보냈다. ㄴ씨는 그달에만 6번 점심·퇴근시간에 ㄱ씨를 따라다녔고, 11차례나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내왔다.
ㄱ씨의 신고(스토킹·폭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ㄴ씨는 고작 ‘벌금형’을 받았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해 12월 ㄴ씨에게 벌금 700만원을 선고하고 40시간의 스토킹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명령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스토킹 행위 등으로 인한 피해자의 고통이 컸을 것을 보인다”면서도 “ㄴ씨가 잘못을 인정하면서 다시는 ㄱ씨에게 접근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고, 3회의 벌금형 범죄 전력만 있는 점 등을 두루 참작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법원이 인정한 정상 참작 사유는, 1년 전 오늘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에서 직장 동료를 스토킹하다 살해한 전주환(32)의 ‘다짐’과 꼭 닮았다. 서울교통공사 역무원이었던 전씨는 입사 동기인 피해자로부터 스토킹 혐의로 고발당한 뒤 “앞으로 피해자에게 연락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8개월 뒤인 2022년 9월14일 피해자를 살해했다.
스토킹 사건 중 ‘실형’은 4%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1주기를 맞아 13일 한겨레가 ‘직장 내 스토킹 범죄’ 사건의 1심 판결문 50건을 분석한 결과, 스토킹 혐의만으로 실형이 선고된 것은 단 2건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스토킹 범죄를 엄단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커지고 있지만, 정작 법정에선 솜방망이 처벌이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스토킹처벌법)을 위반한 혐의로 재판을 받은 피고인 10명 중 7명에게 집행유예(18건·36%)와 벌금형(16건·32%)이 선고됐다. 분석 대상 판결 50건 중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반의사불벌죄)는 의사를 밝혀 공소기각된 사건(14건)을 제외하면, 집행유예와 벌금형이 선고된 비율이 94%에 달한다. 벌금형 중 가장 높은 게 벌금액 500만원이었다.
실형이 선고된 사건은 고작 2건(4%)이었다. 살인죄(징역 13년형) 가석방 상태에서 스토킹 범죄를 저지른 피고인과 ‘접근금지’ 등 법원의 ‘잠정조치’를 이행하지 않고 피해자 2명을 스토킹한 피고인이 각각 징역 10개월, 징역 1년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특히 눈에 띄는 건, 피고인이 피해자에 대한 연락·접근 금지 등 법원으로부터 받은 잠정조치 명령을 어긴 사건이 9건에 달했는데, 실형이 내려진 건 단 1건뿐이라는 점이다.
현행 스토킹처벌법은 스토킹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흉기 또는 그 밖의 위험한 물건을 휴대하거나 이용할 때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게 돼 있으나, 법원이 처벌 한도 안에서도 관대한 판결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반성하고 있다’는 한마디가 단골 감경 요소
법원은 주로 ‘범행을 인정한다’, ‘반성하고 있다’는 피고인의 말을 근거로 솜방망이 판결을 내렸다. 서울남부지법이 지난해 11월 직장 동료 ㄷ씨를 스토킹하며 ㄷ씨 집의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거나 ㄷ씨의 택배 물건을 사진 찍으며 스토킹한 ㄹ 씨에게 벌금 500만원을 선고한 게 대표적 사례다. ㄹ씨는 2010년 건조물침입죄 등으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형을 받은 전력이 있는데다, ㄷ씨로부터 용서도 받지 못한 상태였지만, 법원은 “ㄹ씨가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피해자의 주거지에 접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것을 감형 사유로 들었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손해를 보전하기 위해 법원에 ‘공탁금’을 냈다는 것을 감형 사유로 본 사건도 3건에 달한다. 청주지법 충주지원은 올해 2월 자신이 달걀을 납품하는 가게의 사장을 스토킹한 ㅁ씨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ㅁ씨는 피해자의 직장 앞에 두 차례 차량을 주차한 채 경적을 울리며 피해자를 기다렸고, 72회에 걸쳐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거의 대부분의 스토킹 행위가 수신되지 않은 전화 통화 시도에 불과한 점, 피고인에게 벌금형을 초과하는 전과가 없는 점”과 함께 “피해자를 위하여 300만원을 공탁한 점”을 감형 요소로 적시했다.
최한얼 인천지검 검사는 지난 7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과 양형연구회가 공동 개최한 심포지엄에서 스토킹 범죄에 대한 이런 솜방망이 처벌이 중대 범죄로 악화될 가능성을 언급하며 “범죄 예방적 측면에서 더 이상의 스토킹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재발을 차단할 수 있는 강력한 형사제재를 도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는 물론 다른 범죄 혐의로도 함께 기소된 사건까지 더하면 분석 대상 판결 건수는 75건으로 늘어나는데, 스토킹이 명예훼손(8건)·협박(7건)·업무방해(6건)는 물론, 강간(1건)·예비살인(1건)·폭행(2건) 등 강력범죄로도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한겨레의 이번 분석은 ‘판결서 인터넷 열람’ 사이트에서 ‘직장’ ‘스토킹’ ‘동료’ ‘회사’ 등의 연관 검색어를 넣어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다음날인 지난해 9월15일부터 올해 9월8일 사이 이뤄진 1심 판결 중 ‘직장 동료나 업무상 알게 된 이들을 상대’로 한 사건(75건) 등을 1차 ‘직장 내 스토킹 범죄’로 추려낸 뒤, 피고인이 오롯이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만 재판을 받은 경우(50건)를 중심으로 양형 내역을 분석했다.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와 다른 범죄로 같이 기소된 사건을 포함한 전체 75건을 분석했을 때,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가 전·현 직장 동료인 경우는 모두 47건, 업체 사장·직원과 손님인 관계는 22건, 납품 업자 등 기타 업무상 알게 된 관계가 6건이었다.
스토킹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경찰·응급구조사인 경우도 있었으며, 미용실 손님이 미용사를, 환자가 의사를, 유사 성행위 업소 ‘키스방’ 손님이 종업원을 스토킹하는 경우도 있었다. 버스 운전기사가 다른 버스 기사를 스토킹하면서 버스로 운행 중인 버스를 들이받은 사건도 있었다.
피해자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여성이 피해자인 사건은 65건으로 86%에 달했으며, 남성이 피해자인 경우는 6건, 판결문에 피해자의 성별이 드러나지 않은 게 4건이었다. 피해자가 복수인 사건을 포함해 20대 피해자는 20명, 30대 14명, 40대 19명, 50대 7명, 60대 1명 등이었다.
채윤태 기자
chai@hani.co.kr 오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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