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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피해자 진술만으로 유죄 판단? ‘비동의 강간죄’를 향한 왜곡

등록 2023-01-30 07:00수정 2023-01-30 14:21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들머리의 모습. 과천/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들머리의 모습. 과천/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2022년 11월 서울중앙지법은 평소 알고 지낸 ㄱ씨를 강간한 혐의로 기소된 ㄴ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인 ㄱ씨는 피해를 입기 전 ㄴ씨에게 ‘하지 마라. 무섭다’고 말했지만, 재판부는 “(이 발언으로) 성관계를 중단해도 이전처럼 다시 성관계를 이어나가게 될 것으로 피고인이 짐작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피고인이) 피해자의 진정한 심리상태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동의한 줄 알았다’는 말은 ‘서로 동의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지만, 법원은 결국 ‘동의한 줄 알았다’는 가해자의 손을 들어줬다.

여성가족부가 지난 26일 검토를 발표했다가 철회한 ‘비동의 강간죄’는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폭행과 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본다. 최근엔 강간죄를 폭넓게 해석하는 판례가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강간죄가 성립하려면 피해자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 있어야 한다는 게 법조계 해석이다. 때문에 ㄱ씨처럼 성범죄 피해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가해자의 일상적인 폭력과 다양한 억압에 시달린 피해자가 가해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성관계를 해야만 하는 경우, 피해자가 무방비 상태에서 성폭력을 당하는 경우, 금전적인 이유 등으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의존하는 경우, 가해자의 체격 조건이 우월해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적극적인 비동의 의사를 표시할 수 없는 경우 등도 가해자 처벌이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비동의 강간죄’는 ㄱ씨처럼 성범죄 피해를 인정받지 못한 법의 사각지대를 메운다.

하지만 ‘비동의 강간죄’를 반대하는 쪽은 처벌 여부가 전적으로 피해자의 의사에 따라 좌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적 영역에서 이뤄진 성관계 동의를 증명하지 못하면 가해자로 몰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전문가 의견은 다르다. 전윤경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았다고 곧바로 유죄의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전 교수는 최근 학술지 <이화젠더법학>에 실린 논문 ‘현행 성범죄의 처벌규정 체계의 재구조화 방안’에서 “(사건 발생) 당시 상황에 대한 피해자 진술과 가해자 진술 중 누구의 진술이 신빙성이 있는지 밝히기 위한 증거 수집이 주된 수사 방향이 될 것이므로, 결국 ‘성인지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진술의 신빙성 판단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폭행, 협박과 같은 유형력이 수반되지 않은 성범죄의 경우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증거를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정황증거를 더욱 풍부하게 수집하고, 정확하게 해석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비동의 강간죄를 먼저 도입한 다른 나라도 피해자 진술만으로 유죄를 판단하지 않는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 2020년 펴낸 ‘비동의 간음죄(강간죄)의 비동의 판단기준 마련을 위한 국내외 사례연구’ 보고서를 보면, 2003년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한 영국은 강간 사건에서 상대방이 동의 능력이 있었는지, 동의할 자유가 있었는지, 가해자가 상대방의 동의 여부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등을 강간죄 판단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 보고서를 쓴 연구진은 “영국 검찰에서는 가정폭력의 경우, (가해자가) 권력 위치에 있는 경우(특히 가족 구성원, 교사, 종교 지도자, 고용주, 조직폭력, 보호자, 의사), (피해자가) 재정적으로나 보살핌을 위해 가해자에게 의존한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이 차이가 있는 경우, (피해자가) 동의할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지 않은 경우를 예로 들면서 자유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인가를 기준으로 동의할 자유를 판단하고 있다”며 “(이는) 우리의 비동의 간음죄(강간죄) 판단기준 마련시 참고할 부분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유죄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16년 '타인의 인식 가능한 의사에 반하여' 이뤄진 성적 행위를 처벌하는 내용으로 형법을 개정한 독일도 마찬가지다. 독일 연방대법원이 ‘비동의 강간죄’로 인정한 사례는 콘돔을 한 성관계만 동의한다는 의사를 밝혔는데도 성관계 중 몰래 콘돔을 빼거나 가정폭력 상황에서 이뤄진 성적 행위(구타를 당해 여전히 아픔을 느끼며 울고 있는 피해자를 남편인 가해자가 침대로 옮긴 후 성관계를 가진 경우) 등이 있다.

법무부는 “비동의 강간죄’로 개정할 계획이 없다”며 “사회 각층의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지만, 도입 논의는 충분히 이뤄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018년 여가부 연구용역 보고서 ‘젠더폭력 관련 법체계 개선방안’을 보면, 설문조사에 참여한 경력 10년 이상 경찰과 교수, 검사, 판사, 변호사, 엔지오(NGO·비정부기구) 활동가 54.2%(26명)가 “폭행·협박 요건을 비동의 요건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답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 2021년 6월 스킨십 또는 성관계 경험이 있는 10∼40대 6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도 ‘동의 없이 이루어진 성관계는 성폭력’이라는 문항에 그렇다고 응답한 비율은 96.7%(580명)로 나타났다. 이에 앞서, 지난 2019년 11월엔 ‘성범죄가 항거 불능할 정도로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만 처벌이 가능하도록 돼있는 현행 법체계를 바꾸고 성범죄 양형기준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청원글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적이 있다. 한 달 동안 26만4천여명이 이 청원에 동의했다. 하지만 법무부는 상대방의 동의 없이, 또는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이뤄진 성관계를 성폭력 범죄로 처벌하는 법안이 발의될 때마다 반대 의견을 고수하고 있다.

박아름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29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강간죄 구성요건을 현행 폭행·협박에서 상대방의 동의 여부로 하는 법안은 15년 전인 2007년 17대 국회 때도 발의된 적이 있다. 여성운동 역사로 보면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제기된 논점”이라고 말했다. 이어 “사회적 논의가 충분해야 한다는 법무부 주장은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한국여성민우회와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등 전국 208개 여성인권단체가 속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 회원들이 지난 2019년 9월18일 오후 국회 앞에서 강간죄 구성요건의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간강죄 구성요건을 ‘폭행, 협박’에서 ‘동의’여부로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한국여성민우회와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등 전국 208개 여성인권단체가 속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 회원들이 지난 2019년 9월18일 오후 국회 앞에서 강간죄 구성요건의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간강죄 구성요건을 ‘폭행, 협박’에서 ‘동의’여부로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이기순 여성가족부 차관(왼쪽)이 지난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여성가족부 제공
이기순 여성가족부 차관(왼쪽)이 지난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여성가족부 제공

우리나라에서도 관련 판례가 쌓이고 있다. 대법원은 2019도3341 판결에서 “피해자가 사전에 성매매에 동의하였다 하더라도 피해자는 여전히 그 동의를 번복할 자유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예상하지 않았던 성적 접촉이나 성적 행위에 대해서는 이를 거부할 자유를 가진다”며 “피해자에게 이루어진 행위에 대하여 피해자의 동의가 있었는지 여부는 그 행위의 경위 및 태양, 피해자 연령, 범행 당시 정황 등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볼 때 그 행위로 인해 피해자의 성적 자유 또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었는지를 기준으로 삼아 구체적·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또 2015도9436 판결에서도 “아동·청소년이 외관상 성적 결정 또는 동의로 보이는 언동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타인의 기망이나 왜곡된 신뢰관계의 이용에 의한 것이라면 이를 아동·청소년의 온전한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에 의한 것이라고 평가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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