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순 여성가족부 차관이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여성가족부 제공
장수경 | 젠더팀장
8년 동안 이어진 정부 정책 논의가 단 9시간 만에 뒤집혔다. ‘비동의 강간죄’ 얘기다.
여성가족부는 지난 26일 오전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2023~2027)을 발표하면서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가 정부·여당이 반발하자 이날 저녁 “개정 계획이 없다”며 철회했다. 앞으로 5년 동안 추진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정책과제를 한나절 새 번복하면서 여가부는 우스운 꼴이 됐다.
이날 벌어진 상황은 이랬다. 26일 오전 11시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 브리핑 때 한 기자가 강간죄 개정 검토 배경과 법무부와 논의 과정 등을 묻자, 김종미 여가부 여성정책국장은 “여러차례 관계부처와 협의 과정을 거쳤다”고 답했다. 현재 형법은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를 처벌하도록 하는데, ‘폭행 또는 협박’이란 요건을 ‘동의 여부’로 대체하는 것을 검토하기로 정부 차원에서 의견을 모았다는 얘기였다. 김윤전 법무부 양성평등정책담당관도 브리핑에 배석했지만 별다른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비동의 강간죄’ 도입 추진도 아닌 검토였을 뿐이었지만, 반발은 거셌다. 약 6시간 뒤인 오후 5시께, 법무부는 “비동의 강간죄 개정 계획이 없다”는 공지를 출입기자단에 보냈다. 이날 여가부가 발표한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은 한동훈 법무부 장관도 당연직 위원으로 참여한 양성평등위원회가 의결한 내용이었는데, 발표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뒤늦게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여당 쪽 압박도 이어졌다. 지난해 대선 때 ‘이대남 전략’을 주도했던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자신의 에스엔에스(SNS)에 “뭐? 비동간(비동의강간)?” 단 네 글자를 올렸다. 곧이어 대표적 ‘윤핵관’인 권성동 의원이 “이 법이 도입되면 합의한 관계였음에도 이후 상대방 의사에 따라 무고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글을 자신의 에스엔에스에 올렸다. 그리고 저녁 7시53분 여가부는 “정부는 개정 계획이 없음을 알려드린다”고 기자단에 문자메시지 알림을 보냈다. 완전한 ‘항복’이었다.
여가부가 정부·여당 눈치를 보다 정책을 뒤집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청년 성평등 문화추진단 지원 사업인 ‘버터나이프 크루’를 폐지한 게 대표적이다. 김현숙 여가부 장관은 지난해 6월30일 ‘버터나이프 크루 4기’ 출범식에 참석해 축사까지 했는데, 당시 원내대표였던 권 의원이 7월4일 “지원 대상이 페미니즘에 경도돼 있다”며 사업을 비판하자 이튿날 전면 재검토를 발표했다.
권 의원은 이번엔 여가부가 비동의 강간죄 검토를 발표해 갈등을 조장했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정말 여가부가 갈등을 조장했나. ‘동의 없는 성관계는 성폭력’이라는 당연한 상식을 ‘젠더 갈라치기’로 이용한 건 오히려 정치권 아닌가.
그동안 정부·여당은 여가부 폐지와 젠더 문제를 ‘국면 전환용’으로 써왔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에스엔에스에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글자를 올려 지지율 반등을 시도했다. 대통령 지지율이 바닥을 기던 지난해 10월엔 정부·여당이 여가부 폐지를 포함한 정부조직개편안을 들고나왔다. 3월8일 열릴 전당대회에서 당대표 후보 출마를 선언한 ‘친윤’ 김기현 의원은 지난 22일 민방위훈련 대상을 여성으로 확대하는 내용의 민방위기본법 개정안을 내겠다고 밝혔다. 이들이야말로 여성혐오를 자양분으로 갈등을 조장한 것 아닌가.
여가부가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을 발표한 지난 26일(현지시각)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인권이사회 4차 국가별 인권상황 정기검토 본심의에서, 정부대표단은 미국, 스위스, 영국, 캐나다가 질의한 여가부 폐지 및 조직개편 질의에 “여가부 정책과 업무는 축소되거나 약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여가부가 폐지되면 성범죄 관련 업무는 법무부로 이관된다고 한다. 동의 안 한 성관계는 성폭행이라는 걸 인정은커녕 검토조차 할 수 없다는 법무부가 성폭력 피해자들을 어떻게 보호하고 젠더폭력을 예방할 건지 한숨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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