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킹 살인 사건이 발생한 서울 신당역에서 지난 9월18일 오전 화장실 들머리에 마련된 추모의 공간이 추모의 메시지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사진은 여성화장실 표시와 메시지를 다중노출기법으로 찍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ㄱ씨는 연인이었던 ㄴ씨를 스토킹했다. ㄴ씨는 지난해 10월 스토킹처벌법(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시행 이후 ㄱ씨를 스토킹 혐의로 고소했고, ㄱ씨에게는 피해자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잠정조치도 내려졌다. 그러자 ㄱ씨는 피해자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ㄴ씨 친구들에게 연락해 “(피해자에게) 합의 의사를 물어봐달라”고 했고, 피해자와 관련한 정보를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피해자는 경찰에 ㄱ씨에 대한 제재를 추가로 요청했지만, 불가능하다는 답을 들어야 했다. ㄱ씨가 ㄴ씨 주변인에게 연락하는 것은 ㄴ씨에 대한 스토킹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스토킹처벌법이 시행된 지 21일로 1년을 맞지만, 여전히 피해자 보호에 사각지대가 존재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9월14일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이 발생한 뒤에야 법무부가 뒤늦게 반의사불벌죄 조항 폐지, ‘온라인 스토킹’ 처벌 규정 신설 등을 담은 스토킹처벌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겠다고 19일 밝혔지만, 이마저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스토킹 범죄 행위와 피해자 범위를 법에 협소하게 규정해 놓은 탓에 다양한 형태의 스토킹에 대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행법은 처벌이 가능한 스토킹 유형을 5가지로 정하고 있다. 법무부가 발표한 개정안대로 온라인상 스토킹 행위도 처벌 대상이 되면 6가지가 된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젠더폭력연구본부 부연구위원은 <여성과 인권> 최신호에 “가해자가 피해자 감시와 추적을 위해 지피에스(GPS) 등 전자장치를 사용하는 행위, 피해자에 대해 해킹을 시도하는 행위, 피해자의 반려동물이나 장애인 보조견에 대한 위해 행위 등은 충분히 스토킹으로 볼 수 있는데도 법적 제재가 가능한 행위인지 아닌지가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고 밝혔다.
독일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서혜진 변호사(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가해자가 항상 똑같은 방식 또는 법에서 정한 방식으로만 스토킹을 하지 않는다”며 “지금처럼 스토킹 유형을 법에 열거하더라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피해자에게 불안감과 공포심을 주는 행위’와 같이 스토킹을 포괄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규정 신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독일이 이런 형태의 법을 시행하고 있다. 독일 형법 제238조 제1항은 스토킹 유형 7가지(제1호~제7호)를 열거한 뒤에 마지막에 ‘그 밖의 제1호부터 제7호까지와 유사한 행위’ 규정을 두고 있다.
스토킹처벌법이 정의하는 피해자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된다. 지금은 스토킹 범죄로 직접적인 피해를 본 사람만을 ‘피해자’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피해자 보호조치는 스토킹 범죄로 직접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위협하기 위해 피해자 자녀의 학교 앞에서 기다리거나 피해자 부모를 찾아가는 등 주변인을 스토킹하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한다”며 “피해자 주변인을 위한 실질적인 보호조치는 스토킹처벌법 어디에도 없다”고 말했다. 스토킹 가해자가 피해자 가족 또는 직장 동료, 친구 등 주변인에게도 해를 입힐 위험성이 높은 점을 고려하면, 피해자 범주를 주변인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스토킹 방지법’은 경찰이 피해자 주변인을 보호하기 위해 가해자에 대한 접근금지 명령 신청을 법원에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스토킹을 적극적인 애정 표현 정도로 치부하는 인식을 하루빨리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소희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스토킹 범죄는 피해자 가운데 80% 이상이 여성일 정도로 구조적인 성폭력 문제다. 정부가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부정하고 지우려고 할 것이 아니라, 심각성을 인지해야 한다. 사법기관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