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왼쪽)이 2014년 1월11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식당에서 이진순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과 만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돌아가시기 하루 전, 면회 금지로 오랜만에 만난 사모님께 연신 “예쁘다, 예쁘다”
평범하고 시시껍절한 사람들, 적은 월급 가지고도 열심히 일하고 이웃과 잘 지내는 사람들과 좋은 마음으로 바람을 나누는 순간이 내겐 ‘단맛’이라던 말씀, 기억합니다
선생님! 위중하신 줄은 알았지만, 몇 년 전 전립선암과 복막염으로 연이어 호된 곤욕을 치르고 난 뒤에도 떨치고 일어나셨으니 이번에도 거짓말처럼 완쾌하셔서 다시 호탕한 웃음소리 들려주실 줄 알았습니다. 의사의 경고도 뿌리치고 심장보조장치를 삽입하거나 폐에서 물을 빼내는 시술조차 거부하신 건, 자기 의지에 따라 조용히 마지막 길을 준비하고 싶으셨던 건가요?
“이 선생, 내가 앓으면서 하나 발견한 게 있는데 ‘내가 죽음 앞에서 별로 비감해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살아서 제삿밥 먹는 나이가 되다 보니 병이 난 거지. 죽는 게 무섭다거나 비감하지 않아요.”
선생님은 이미 죽음에 초탈한 분이셨지만, 저는 선생님을 다시 뵐 수 없다는 사실이 허망하고 비통할 뿐입니다.
선생님을 처음 뵙던 날이 생각납니다. 2013년 12월, 몇 차례 전화로 인터뷰를 청했으나 거절하시다가 얼굴이라도 뵙게 해달라는 제 간청에 못 이겨 나오신 자리였지요. 탄광으로 돈을 번 사람이라 여러 사람 목숨을 산재로 잃게 했으니 세상에 이름을 낼 자격이 없다고 하셨고, 가난한 해직 기자들에게 집을 사주거나 민주화운동에 돈을 댄 것도 누굴 돕기 위해 한 일이 아니니 ‘자선사업가’나 ‘독지가’로 선생님을 미화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요구를 다 받아들이는 걸 전제로 어렵사리 인터뷰를 허락해 주셨지요.
막상 인터뷰를 시작하니 선생님의 말씀은 단호하고 신랄했습니다. 그때 쓴 제 노트에는 거침없이 쏟아지는 선생님 말씀을 놓칠세라 흔들리는 필체로 황급히 따라간 흔적이 역력합니다.
“세상의 모든 ’옳은 소리‘에는 반드시 오류가 있다. 잘못 알고 있는 것만 고정관념이 아니라 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세상엔 정답이 없고 무수한 해답이 있는데, ‘나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리다’라는 건 군사독재의 악습이다.”
“재산은 세상 것이다. 개인이 혼자 이룬 건 없다.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 관리하는 것뿐이니 세상과 나누는 게 당연하다.”
“어떠한 권력도 이기면 썩는다. 예외는 없다. 아비들도 처음부터 썩은 놈은 아니었다. 그놈들도 예전엔 아들이었는데 아비 되고 난 다음에 썩은 거다.”
박근혜 정부가 모든 정치적 비판을 ‘종북’으로 몰고 극우집회에서 할아버지들이 가스통을 굴리며 극렬시위를 벌이던 때였습니다. 이런 노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해주십사 청했을 때 선생님은 벽력같이 목소리를 높이시며 말씀하셨지요.
“이해하지 마세요.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똑똑히 봐두세요.”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가 있었고 새 정부가 들어서고 총선에서 여당이 압도적 승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런 승리가 문제였을까요? ‘모든 권력은 이기면 썩는다’는 경고를 가볍게 여긴 것일까요? 보궐선거를 앞두고 민심이 흉흉합니다. 열심히 달려왔는데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한 것 같은 무력감과 좌절감이 미세먼지처럼 자욱하게 우리 마음에 내려앉습니다. 또 야단맞을 이야기지요? 선생님의 말씀을 이 순간 다시 되새깁니다.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세상이 잘 돼야 한다. 사람이 즐거워야 한다. 신나야 한다. 나도 신나고 다들 신나라! 그러니 절망적일수록 신 내야지, 기죽고 쪼그라들 때일수록 신 내야지. 비관이나 좌절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은 대개 지배자들에 의한 훈련의 결과이지, 자연스러운 본성이 아니에요. 찰랑찰랑 신나야 해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채현국 이사장의 빈소.
선생님은 비문에 ‘쓴맛이 사는 맛’이라고 쓰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인생의 쓴맛, 고난과 문제가 삶을 풍부하게 하고 성숙시키니 그게 사람 사는 맛이라고요. 하지만 ‘쓴맛이 사는 맛’이라고만 새겨두면 솔직하지 못한 것 같으니 ‘그래도 단맛이 달더라’라고 덧붙이겠다고 하시며 껄껄 웃으시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평범하고 시시껍절한 사람들, 적은 월급 가지고도 열심히 일하고 이웃과 잘 지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좋은 마음으로 바람을 나누는 순간이 내겐 단 맛”이라고 하시면서요.
쓴맛을 회피하지 않고 단맛을 찾기 위해, 가장 맥빠지는 순간에도 신을 내기 위해, 평범하고 시시한 사람들과 마음을 모으겠습니다. 돌아가시기 하루 전, 퇴원해서 집에 오셔서 코로나19 면회금지로 오랜만에 만난 사모님께 연신 ‘예쁘다’고 애틋함을 전하셨다는 선생님, 좋은 사람들과 소박한 술잔을 나누며 개구쟁이처럼 농담을 던지시던 선생님의 신나는 표정을 기억하며, 저희도 신나게 살겠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 관성에 물들기를 거부하셨던 영원한 자유인, 선생님이 계셔서 행복했습니다. 언제나 바람같이 자유롭고 경쾌했으나 삶의 발자국마다 깊고도 거대한 울림을 남긴 거인의 삶이셨습니다. 이제 자유로운 곳에서 평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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