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배춘희 할머니 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서울중앙지법이 “원고들에게 1인당 1억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8일 오전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이 입장을 밝히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법원이 8일 고 배춘희 할머니 등 12명이 일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한 것은 반인권적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타국의 주권 행위는 재판할 수 없다’는 국가면제론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처음으로 인정했다는 의미가 있다.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피해를 오랜 관습법으로 굳어진 국가면제론이 아닌 헌법적 권리와 인권 문제로 보고 사법적 책임을 물은 것이다.
이 사건이 2013년 처음으로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된 뒤 1심 선고까지 무려 8년이 걸린 것도 일본의 ‘국가면제론’ 주장과 관련된다. 위안부 피해자인 배 할머니 등은 2013년 8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원고 1명당 각 1억원의 위자료를 청구하는 조정 신청을 처음으로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이는 2011년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헌재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정부가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피해자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피해자들은 양쪽 당사자의 협상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조정을 신청했지만, 일본 정부는 헤이그 송달협약 13조에 따라 ‘자국의 주권 또는 안보를 침해할 것이라 판단하는 경우’에 해당한다며 수년째 조정에 응하지 않았다. 그사이 배 할머니와 김외한 할머니 등이 별세했다. 결국 피해자들의 요청으로 사건은 2016년 1월 정식 재판으로 회부됐다. 지난해 1월 법원은 일본 정부에 공시송달로 소장을 접수해 소송이 개시된 것으로 간주했고, 피고(일본 정부)석이 빈 채로 4회의 변론 끝에 1심을 선고했다. 앞서 1998년 위안부 및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일본 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 지부에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관부재판’이라 불림) 1심에서 일부 승소한 사례가 있지만, 이번 경우처럼 한국 법원에서 타국의 주권적 행위에 대한 배상 책임을 전면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처음이다.
재판부는 우리 헌법을 근거로 이 사건에서 가장 쟁점이 된 피해자들의 ‘재판받을 권리’를 인정했다. 일본이 반인권적 범행을 저지른 사건임에도 국가면제론을 이유로 소 제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헌법에 반한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헌법 27조(재판청구권)와 유엔 세계인권선언도 재판받을 권리를 천명하고 있다. 권리구제의 실효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이는 헌법상 재판청구권을 공허하게 만드는 것”이라며 중대한 인권침해를 겪은 피해자들의 실질적인 권리 구제를 강조했다.
재판부는 또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성적 착취와 폭력 등의 불법행위는 국제법상 강행규범(절대규범)을 위반했기 때문에 이러한 범행까지 국가면제를 이유로 책임을 덜어줄 순 없다고도 판단했다. “국가면제 이론은 주권국가를 존중하고 함부로 타국의 재판권에 복종하지 않도록 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국제 강행규범을 위반해 타국의 개인에게 큰 손해를 입힌 국가가 국가면제 이론 뒤에 숨어 배상과 보상을 회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재판부는 한국에서의 이번 재판이 피해자들로선 ‘최후의 수단’인 점도 강조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과 미국 등 법원에서 수차례 민사소송을 제기했지만 모두 기각되거나 각하됐다. 일본은 1965년 청구권 협정에 따라 배상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는 입장으로, 일본 최고재판소도 피해자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역시 피해자가 배제된 양국 간 협의로 헌재도 이 합의가 피해자의 피해 회복을 위한 법적 조치는 아니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이에 재판부는 “청구권 협정, 2015년 합의도 피해자 개인에 대한 배상을 포괄하지 못했다. 협상력, 정치적 권력을 갖지 못하는 개인에 불과한 피해자로선 이 소송 외에 손해를 배상받을 방법이 요원하다”고 했다.
고 곽예남 할머니 등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대리하는 이상희 변호사는 “앞서 독일의 나치 범행에 대해 이탈리아에서도 비슷한 판결이 나왔다”며 “이는 피해자 개인의 인권을 더 중시해야 한다는 국제법적 흐름을 공고히 한 것으로, 이를 시발점 삼아 이 사안을 인권의 차원에서 미래지향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짚었다.
장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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