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지난해 1월15일 오전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정기 이사회에 참석해 체육계 폭력·성폭력 근절 실행대책을 발표하던 중 고개 숙여 사죄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지도자들이 선수들에게 부당한 행위를 자행하는 것을 뿌리 뽑겠다.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철저히 쇄신하겠다.” 지난해 1월,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국민들 앞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이 회장은 조재범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팀 코치의 폭행과 성폭행 사건이 불거지자 대국민 사과에 나섰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 회장은 체육계 폭력 행위를 뿌리뽑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 회장의 약속은 공염불에 그쳤습니다. 지난달 26일, 최숙현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 선수가 감독 등 소속팀 관계자들의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숨진 최 선수가 견과류를 먹었다는 이유로 감독에게 폭행을 당했고, 회식 자리에서 탄산음료를 시켰다는 이유로 20만원어치 빵을 삼켜야 했다는 동료들의 폭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회장의 약속도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6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긴급현안질의에 참석한 이 회장은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히 조사하고 조직 문화를 바꿔 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기시감이 드는 발언입니다. 허울뿐인 말이 반복되는 동안 선수들의 고통도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체육계의 폭력사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때마다 피해는 무거웠고 처벌은 가벼웠습니다. 피해와 처벌 사이의 무게 추를 조정한 건 이 회장과 대한체육회입니다. 2013년 수구 선수들이 여자 선수들의 탈의실에 불법촬영 카메라를 설치했다 적발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대한수영연맹은 이들을 영구제명했지만, 단 3개월 만에 이들의 선수 자격은 부활했습니다. 당시 수영연맹 회장은 이기흥 회장이었습니다.
2015년엔 대한빙상경기연맹이 여자 선수들을 성추행한 빙상 실업팀 지도자를 영구제명했습니다. 하지만 대한체육회는 이듬해 선수위원회 재심을 통해 해당 지도자의 처벌을 3년 자격정지로 감경했습니다. 이 회장이 대한체육회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던 때입니다.
이 회장은 ‘측근 봐주기’ 의혹으로 수세에 몰린 적도 있습니다. 2017년 국회 국정감사에선 대한체육회가 같은 해 4월 내부 규정을 바꿔 금품수수 혐의 등으로 영구 제명당한 대한수영연맹 부회장 등 5명의 징계를 감면해준 문제가 제기됐습니다. 이들이 문제를 일으킨 시기도 이 회장이 수영연맹 회장으로 재임할 때였습니다. 무거운 잘못을 저질러도 구제해주는 든든한 배후 덕에 체육계의 과오가 되풀이 되고 있던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드는 대목입니다.
가해자들이 쉽게 용서받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피해자들이 목놓아 외친 구조 신호는 외면당했습니다. 최 선수는 세상을 등지기 전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에 피해 신고를 했음에도 센터의 미온적인 대처로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센터의 안일한 대처는 통계로도 드러납니다. 지난해 10월 기준 스포츠인권센터에서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접수된 폭력 및 성폭력 관련 신고 91건 중 대한체육회가 직접 조사한 건수는 고작 3건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 96.7%는 해당 회원종목 단체 또는 시도 체육회로 이첩했습니다.
이에 대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속한 곳으로 책임을 떠미니 조사가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상급 기관인 대한체육회가 온정주의로 가해자를 보듬는 마당에 현장 관계자들 또한 피해자들의 호소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리 없었단 것입니다.
여러 시민·사회단체는 이 회장이 체육계 수장으로서 되풀이되는 폭력 행위에 책임지고 사퇴를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40여개 체육계 시민·사회단체는 6일 성명서를 내고 “스포츠 혁신의 변화를 잠재우고 시대 역행적인 행보를 일삼은 이기흥 회장은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이 회장에 대한 사퇴 요구는 지난해 조재범 전 코치의 성폭행 사건 당시에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 회장은 “현안 해결에 전념할 때다. (사퇴할) ‘때’가 아니다”라며 사퇴 요구를 일축했습니다. 그러나 1년6개월여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이 회장은 어떤 해법도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저 자리를 지켜왔을 뿐입니다. 그사이 촉망받던 또 한 명의 선수가 홀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제 무게 추는 옮겨져야 합니다.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와 책임자가 물러나야 합니다. 책임져야 마땅한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게 ‘그 사람들 죄를 밝혀달라’는, 최 선수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목소리에 응답하는 출발점일 것입니다. 1년여 전 이 회장이 말했던 “때”는 바로 지금이 아닐까요.
강재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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