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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온갖 영상물이 소란스럽게 채우고 있는 나의 뇌여!

등록 2020-06-13 17:17수정 2020-06-14 23:55

[토요판] 이런 홀로
티브이가 멈춘 뒤 생긴 일

오래된 티브이 고장 났지만
이번도 작은 구식 ‘테레비’ 찾아
당근마켓 중고시장 기웃기웃

티브이 없는 두달, 공백 못 느껴
노트북 오티티로 어느새 대체
너무 낡아 쉰내 났던 티브이 고민
‘이 거지 같은 티브이로도 이렇게 많이 보는데, 빵빵한 사운드와 고화질 풀에이치디(HD)라니 안 될 일이지.’ 지금보다 더 많이 보았다가는 현실에서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티브이가 만들어낸 온갖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유사 현실의 덩어리 속에 깨끗하게 잠겨버릴 것 같았다. 게티이미지뱅크
‘이 거지 같은 티브이로도 이렇게 많이 보는데, 빵빵한 사운드와 고화질 풀에이치디(HD)라니 안 될 일이지.’ 지금보다 더 많이 보았다가는 현실에서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티브이가 만들어낸 온갖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유사 현실의 덩어리 속에 깨끗하게 잠겨버릴 것 같았다. 게티이미지뱅크

티브이(TV)가 고장 난 지 두 달이 넘었다. 내 집의 티브이는 2004년식 삼성 명품 에프플러스(F+) 완전 평면이다. 그러니까, 15년쯤 전에 생산된, 기껏해야 15인치쯤 되는 구닥다리 브라운관 티브이라는 이야기다. 어느 날부터인가 소리는 들리는데 중간중간 화면이 깜빡이며 녹색으로 변하더니, 두 달 전 완전히 사망해 녹색 비전 라디오가 돼버렸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삼성 명품 티브이 이전에 내 집에 있던 15인치짜리 엘지 무슨 플래톤 티브이도 그런 식으로 약 6년 만에 사망했다. 어차피 모두 중고로 구입했던 거니까 그들은 내 집에 있던 것보다 훨씬 긴 시간 생을 누리고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심심해서 고쳐 써볼까 생각해본 적도 있지만, 검색 결과는 납땜과 용접을 운운하다가 늘 같은 충고로 마무리되었다. “차라리 새 걸로 사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누가 모르나. 동네 골목만 돌아다녀도 운 좋으면 ‘필요하신 분 가져가세요’라고 써 있는 비슷한 티브이를 발견할 수 있다. 더 크고 좋은 구식도 동네별 중고시장인 당근마켓에 ‘무료 나눔’ 태그를 달고 올라와 있는 것을 종종 본다. 그런 것 정도는 나도 안다.

15년쯤 전 처음 혼자 살 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그때부터 줄곧 이상하게 작은 구식 브라운관 티브이에 고착돼버렸다. 처음엔 어쩌다 그런 티브이가 내 손에 들어왔고, 그저 ‘방이 좁으니까’ 그런 정도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었다. 레트로 티브이가 좀 멋이 있어 보인다는 생각도 처음에는 조금쯤 했을 것이다.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한 다음엔 그냥 티브이가 거기에 있으므로 그것을 보았다. 매일 밤 혼자 맥주를 마시며 수백번 이 채널에서 저 채널로 옮겨 다니면서.

‘고물 테레비’라는 이상한 강박증

몇년 뒤 그게 갑자기 “팟” 하고 블랙아웃 돼버렸을 때, 나는 좀 정신이 멍해졌다. 매일 밤 티브이 앞에서 몽롱하게 취한 채로 대충 하루를 구겨 던져버리는 삶의 태도에 정식으로 경고장을 받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혼자 산 뒤 처음으로 새 티브이를 구입하는 일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티브이 겸용 컴퓨터 모니터를 살 것인가, 최신식 디지털을 살 것인가. 아니면 아예 없이 살 것인가.

그때 왜 그런지 몰라도 또 중고 마켓에서 15인치짜리 작은 브라운관 티브이를 사버렸다. 그리고 14인치짜리 검은색 대우 브라운관 티브이를 들어낸 그 좁디좁은 자리에, 다시 딱 맞는 은색 엘지 플래톤 브라운관 티브이를 올려 두고 만족스러워했다.

그건 어쩌면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는지 모른다. 이미 온갖 물건들로 꽉 차서 무엇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집이었다. 굳이 수고스럽게 배치를 바꿔가며 커다란 티브이를 들여놓을 자리를 새롭게 마련하고 싶지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내 마음 한구석에는 미묘한 형태의 조바심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심각한 중증 시청자였던 나는 더 생생한 화질과 좋은 음질로 시청 경험의 질을 향상시키고 싶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눈앞의 진짜 삶을 외면한 채 해야 할 일을 유예하고 서성이기만 하던 나를 혐오했고, 차라리 티브이를 없애면 없앴지 더 좋은 것을 내 눈앞에 놔 주고 싶지가 않았다. 티브이만 보며 허송한 세월이 벌써 몇년째인지 알 수 없었다. ‘이 거지 같은 티브이로도 이렇게 많이 보는데, 빵빵한 사운드와 고화질 풀에이치디(HD)라니 안 될 일이지.’ 지금보다 더 많이 보았다가는 현실에서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티브이가 만들어낸 온갖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유사 현실의 덩어리 속에 깨끗하게 잠겨버릴 것 같았다.

좀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오랫동안 그런 식으로 티브이를 시청하는 자신을 미워하면서 작고 낡은 구식 브라운관 티브이라는 틀로 나를 제약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정작 중요한 것은 외면하고 애꿎은 티브이 탓을 하면서 말이다.

클립아트코리아
클립아트코리아

수년이 지나 또다시 고물이 사망했고, 나는 데자뷔처럼 똑같은 고민 속에 놓여 있었다. 수년이 지났지만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티브이를 너무 좋아했고, 하루 적어도 3~4시간은 티브이를 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중독 상태를 벗어나지도 못했으며, 그런 나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애증의 티브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2020년을 맞아 이번에야말로 커다랗고 화질 좋은 디지털 티브이를 살 것인가? 이번 기회에 없애버릴 것인가? 그러나 이번에도 내게 고화질 디지털 티브이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소파에 누워 리모컨 버튼을 눌러가며 무작위로 실시간 티브이를 보는 것이 ‘진짜 티브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티브이 수상기 자체를 없애버릴 수는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내면의 갈등은 또다시 반복적으로 ‘고물 티브이’라는 절충안에 이르렀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만들어낸 이상한 강박에 붙들려, 또 비슷한 고물을 사다가 같은 자리에 올려놓을 생각을 하고, 당근마켓을 검색하고 있었다. 그러다 요즘은 레트로 게임기 연결용으로 브라운관 티브이를 찾는 이들이 예전보다 많아졌다는 사실을 알았고, 브라운관 티브이가 생각보다 비싸졌다는 사실도 알았으며, 도저히 2만원 이상을 주고는 저 고물 테레비를 사고 싶지는 않은데… 2002년 출시된 한·일 월드컵 기념판 축구공(모양) 티브이를 그냥 사버릴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두 달이 지나버렸다.

성실히 챙겨봤다, 컴퓨터로

우스운 것은 막상 티브이 없이 지낸 지난 두 달 동안 나는 티브이 수상기의 필요성을 별로 못 느꼈다는 점이다. 지난 두 달간 티브이 중독을 극복했냐고? 티브이에 대한 나의 이상한 강박을 벗어났느냐고? 전혀 아니다. 나는 모든 분야의 각종 프로그램을 실시간 시청과 다시보기로 성실히 챙겨 봤다. 컴퓨터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브라운관이고 뭐고 나는 벌써 오래전에 인터넷으로 티브이를 보는 세계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이미 웨이브, 티빙, 넷플릭스, 왓챠플레이 등 각종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의 정기멤버십 회원이었다. 예전에는 주로 실시간 프로그램은 티브이 수상기로, 다시보기는 오티티 서비스로 시청했는데, 이제 보니 실시간 프로그램 중에서도 오티티로 커버하지 못하는 채널 같은 건 없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노트북 컴퓨터가 아예 티브이 수상기로 고정돼버렸다는 것? 리모컨 버튼을 누를 수 없다는 점? 그 정도다. 이제 실시간 보기로 채널을 바꿔가며 매일 밤 마치 티브이를 보듯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생각해보면 매일 아침 눈 뜨자마자 휴대폰으로 온갖 짤방, 티브이 클립, 유튜브를 돌려보고, 매시간 온갖 영상물이 소란스럽게 뇌를 채우고 있는 마당에, 티브이라니, 티브이라니. 고민조차 너무 낡아서 쉰내가 나는 듯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방송 중인 컴퓨터 너머로 여전히 천덕꾸러기처럼 놓인 2004년식 삼성 명품 에프플러스 완전 평면 티브이가 보인다. 하긴, 언제나 저게 대수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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