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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무지출 데이’ 소비 없이 행복해지고 싶었다

등록 2022-06-04 09:51수정 2022-06-04 19:40

[한겨레S] 이런 홀로
행복에 도달하는 방법
스트레스 풀려고 산 ‘예쁜 쓰레기’
마음의 구멍 못 메우고 자책감만
산책·자전거로 ‘지출 없는 날’ 시도
뜻밖에 마주한 리스크 없는 행복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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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쏟아지는 일들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종종 소비로 스트레스를 풀곤 한다. 과거엔 그저 충동구매로 거론되던 행동이 이른바 ‘시×비용’이나 ‘금융치료’라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 빠르게 자리 잡은 걸 보면, 나 같은 사람이 한둘은 아닌가 보다. 내 경우 이런 식의 충동소비 대상이 꼭 값비싼 옷이나 가방일 필요는 없었다. 화장품 로드숍에서 집은 작은 립스틱 하나, 생활용품점에서 발견한 쓸데없는 장식품 따위를 사는 것만으로도 당장의 불안을 가볍게 해주는 것 같았다. 정신 차리고 보면 방 한구석엔 잘 바르지도 않는 매니큐어 수십개에 먼지가 앉아 있는 식이었다. 순간의 희열을 위해 ‘예쁜 쓰레기’들을 사 모은 뒤엔 지구에 유해한 인간이라는 자책마저 든다.

당연하게도 쇼핑으로 마음의 구멍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 큰맘 먹고 가방을 사도 기쁨이 오래가지 않았다. 이 작고 귀여운 가죽이 나의 결핍을 온전히 메울 순 없는 거다. 금융치료라는 대증치료의 치명적인 단점은 소비로 인한 즐거움의 시간은 짧고, 한달 뒤 카드값이 빠져나가면서 다시 한번 타격을 준다는 데 있다.

일주일 넘게 안 뜯은 택배 상자

이 악순환을 어떻게 끊을 것인가. 가끔 ‘현타’가 올 때면 결심했다. 금융치료 그만두고 광명 찾자! 심호흡하고 카드 지출 내역을 꼼꼼히 들여다봤다. 오늘날 카드 내역이란 한 사람의 식습관과 동선 등을 비롯해 당시의 정신건강 상태까지 엿볼 수 있는 개인정보의 집약체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하루에 택시만 세번 탄 날(돌이켜보면 가장 아깝지만 정말 줄이기 어려움), 약속과 약속 사이 시간이 떠 잠시 들렀던 잡화점에서 그 자리에서 필요를 합리화한 뒤 산 영양제(늘 살 땐 잘 챙겨 먹을 것 같음), 마네킹이 입은 옷이 예뻐서 샀지만 어울리지 않아서 밖에서 한번도 입지 못했던 옷(기간이 지나 환불도 못 함)…. 각종 금융 앱에서 카드 내역을 보기 쉽게 정리해주지만, 보다 보면 자책감만 들어 피하게 되기도 한다.

‘집콕’ 하면 소비도 줄지 않을까? 지난달 코로나19에 확진돼 일주일 격리 생활을 하는 동안 이런 예측은 철저히 빗나갔다. 쇼핑 목적을 가지지 않아도 에스엔에스(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둘러보다 보면 내가 관심 가질 만한 상품이 자꾸 떴고 결제는 지나치게 쉬웠다. 격리 해제된 뒤 입으면 좋을 것 같은 얇은 코트가 이튿날 택배로 도착했다. 일하던 시간에 누워 있으니 쇼핑 시간만 더 길어졌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탐색하고, 더 싼 값은 없는지 쇼핑몰 가격을 비교하고, 할인받을 수 있는 카드와 적립 비율까지 따지는 그 수고로운 과정을 하루에도 몇번씩 했다.

사실 새벽배송과 하루배송이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열광했던 나였다. 온라인 쇼핑의 가장 큰 단점은 지출과 실물을 받기까지의 간극 아니던가. 전날 밤에 주문해도 다음날 출근 전에 도착하는 새벽배송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어 멤버십에 가입하고 물건을 사들였다. 점점 일주일 넘도록 뜯지 않은 택배 상자들이 쌓여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탈퇴했다. 육아하는 부모들에게 하루배송과 새벽배송은 기적이라는데, 홀로 사는 나는 일주일 동안 상자를 안 뜯어도 될 정도로 급하게 받아야 할 물건은 거의 없었다. 오프라인 쇼핑이 어려울 때 온라인 쇼핑으로 도파민만 활성화했다는 점만 재확인하게 된 셈이었다.

쇼핑엔 ‘후회 리스크’가 있다

소비하지 않고도 행복해지고 싶었다. 가끔 의식적으로 ‘무지출 데이’를 실천해보려고 했다. 주로 재테크 카페 등에서 절약 방법을 공유하면서 ‘지출 없는 하루’를 실천하는 것인데, 적어도 약속 없는 주말 중 하루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할 일이 없으면 심심풀이로 들어가던 쇼핑몰 앱에 접속하지 않았다. 되도록 에스엔에스에도 로그인하지 않았다. 가능한 한 쇼핑의 유혹으로부터 멀어지려 했고 노력했다. 이것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이었다. 그러다가도 주말에 밀린 드라마를 보다 주인공이 입고 나온 카디건 브랜드가 궁금해 찾아보는 식의 태세 전환은 너무나 쉬웠지만.

무지출 데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하루는 남은 식빵에 잼을 발라 챙겨 뒷산에 올라갔던 날이었다. 정말 별것 아니지만 정상에서 식빵을 한입 베어 물었더니 뿌듯했다. 이건 사고 싶은 걸 바로 살 때 휘발되는 찰나의 기쁨 뒤 찾아오는 헛헛함이 아니었다. 약간의 수고로움을 들여 땀 흘린 뒤 맛보는 행복은 헛헛하지 않았다. 더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19 확진으로 일주일간 격리하다 해제된 당일 저녁엔 ‘따릉이’를 빌려 집 앞 산책로에서 한강까지 자전거로 내달렸다. 선선한 바람이 몸을 감쌌다. 물건을 사고 나면 상당한 확률로 후회할 가능성이 크지만, 날씨 좋은 날 자전거를 탔다가 후회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쇼핑이 아닌, 산책과 자전거 타기로 스트레스를 푸는 일은 미래의 ‘후회 리스크’를 없애는 일이기도 했다. 무지출 데이는 다이어터들의 간헐적 단식과 비슷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지출 0원’을 맞추는 것은 어렵기도 하지만, 막상 성공하고 나면 소비로 점철된 날들을 ‘디톡스’했다는 생각이 든다.

꼭 백화점 명품관이나 대형마트 진열대를 보지 않더라도 대중교통의 광고판, 스마트폰 곳곳의 알고리즘 모두 내게 쇼핑을 권한다. 그렇게 ‘시장’이 돌아간다. 일상 구석구석에 소비의 부비트랩(건드리면 터지는 폭발물)이 있는데 밟지 않는 게 어찌 보면 이상한 일이다. 쇼핑은 음주나 흡연처럼 여러 전문가가 강력하게 그만하라고 권고하지도 않는다. 때로는 물건 그 자체보다 환상을 파는 세련된 광고와 인플루언서들 사이에서 나는 번번이 졌던 것 같다. 사실 과거형보다 ‘지고 있다’는 현재 진행형이 더 맞겠다.

그래도 계속 노력하고 싶다. 요즘 일년에 몇 없는 귀한 봄과 여름 사이의 쾌청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퇴근한 뒤 마스크를 벗고 저녁 산책을 하면 콧속 가득 아카시아 향이 느껴진다. 일과 중 모니터를 바라보고 씨름하며 느꼈던 괴로움에 실체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걷는 순간은 마음도 너그러워진다. 환불 스트레스 없는 백 퍼센트의 행복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쇼핑보다도 오래 지속되는, 행복에 도달하는 방법의 가짓수를 늘려가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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