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성산동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벽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응원하는 글귀들이 붙어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1990년 1월4일치 <한겨레>에 윤정옥 당시 이화여대 교수가 홋카이도, 오키나와, 타이 핫차이, 파푸아뉴기니 등을 답사하고 관련 자료를 연구해 쓴 ‘정신대 취재기’ 첫회가 실렸다. 그해 11월 37개 여성단체가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출범시키고 1991년 8월 고 김학순 할머니가 용기 있는 증언에 나서며, 해방 이후 수십년간 쉬쉬해왔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비로소 한국 사회에 공론화됐다.
그로부터 꼭 30년, 지난 7일 여성인권운동가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계기로 계속되는 이른바 ‘윤미향·정의연 논란’은 이 운동의 앞날에 커다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일부에선 ‘피해자 중심주의와 어긋났던 운동의 문제’라고 비판하지만, 여성·역사·외교 등 다양한 층위에서 민족주의, 한-일 관계 등 다양한 팩터들이 교차했던 30년 역사를 무 자르듯 쉽게 평가할 순 없다는 지적이 많다. 국가가 풀어야 할 한-일 간 위안부 문제가 미뤄져온 것이 오로지 정대협 탓이라는 식의 일부 전직 외교 관계자들의 주장은 과도하고 사실과 어긋난다는 비판도 거세다. 이용수 할머니의 문제제기를 비단 윤미향 당선자와 정의연뿐 아니라 “대한민국, 세계 시민, 모두를 향한 메시지”(강성현 성공회대 연구교수)로 받아들일 때, 지금의 논란은 진정한 ‘30년 투쟁의 성과 계승’(이용수 할머니)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25일 이용수 할머니의 2차 기자회견 이후 여러 활동가·연구자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진단과 성찰
이신철 아시아평화와역사연구소 소장은 “피해자는 명예회복과 보상이 제일 중요하고, 시민단체는 이를 비롯해 교육이나 제도화, 기억의 문제까지 포괄하기 때문에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며 “일본이 책임을 지지 않은 것과 함께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과도하게 민간에 역할이 맡겨지며 ‘노노갈등’처럼 갈등이 민간으로 전이된 측면이 있다”고 짚었다.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2015년 12·28 밀실합의를 사실상 무효화했지만 이후 이렇다 할 대안을 마련하지 못해 피해자와 활동가들을 방치한 상황이 길어졌다”며 “이 사태는 윤 당선자의 사퇴 여부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지금이라도 정부 외교라인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1990년대부터 일본에서 활동해온 양징자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 전국행동’ 대표는 “피해자의 상처는 흔히들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매우 깊다”고 안타까움부터 털어놓으며 “하지만 일부 언론이 제기하는, 정대협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방해했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 문제 해결이 안 돼 제일 힘든 게 정대협과 정의연이었다”고 반박했다. 실제 정대협은 2000년 국제 위안부 법정 이후 정대협을 해산하려는 계획을 하기도 했고, 여러차례 명칭을 바꾸는 논의도 깊이 진행했지만 단체명이 널리 상징적으로 알려진데다 곧 ‘사라질 단체’라는 이유로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고 김복동 할머니 또한 생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오래 할 줄 몰랐다”고 말하곤 했다.
결국 해방 뒤 45년 만에 증언에 나선 이들 문제의 해결이 30년 동안 미뤄져온 데는 정부와 우리 사회의 책임이 크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은선 세종대 명예교수는 “정의와 진실을 위한 시민단체와 운동이 너무 많은 과제와 일들로 세밀함과 따뜻함을 잃어갔으며 너무 오랜 시간 동안 한두 사람의 어깨에 짐과 과제를 얹어두었다. 그런 과정에서 그들 스스로도 경직되고 관료화되면서 할머니들의 존재와 과거는 한 곁으로 치워지기도 했을 것”이라며 “이용수 할머니의 지금 호소는 우리 모두가 저지른 또 다른 모습의 ‘불의’의 결과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여성학 교수는 “국가가 이 문제를 가져오지 않고 기존의 엔지오를 이용하면서, 군위안부 연구가 지나치게 독점화되고 자원이 특정 집단에 몰린 상황도 배경에 있다”고 짚었다. 실제 국회에 발의된 법안 가운데는 국가 차원의 위안부연구소 출범도 있었지만, 미래통합당의 반대 등으로 처리가 무산됐다.
피해자 할머니들과 정대협은 위안부 문제를 한-일 간 외교 현안을 넘어 전시 성폭력 문제라는 인권의 문제로 전세계에 각인시켜왔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국내에서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으로 해석되고 이용된 것이 현실이다. 조민아 조지타운대 교수는 웹진 <제3시대> 기고에서 “한국 사회에서 이 운동이 갖는 독특한 지위는 피해자·생존자의 서사가 개인의 차원을 넘어 피해자민족주의와 결합해 있고 회색지대를 허락하지 않는 담론이 됐다는 것”이라면서도 “정대협이 피해자민족주의를 부각시키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운동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라고 되물었다. 좀더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임지현 서강대 시지에스아이(CGSI) 소장은 “전시 성폭력 문제를 인간성에 반하는 범죄로 규정되도록 기여한 바는 굉장히 중요하다”면서도 전세계에서 우후죽순 늘어난 소녀상 운동 등의 방식과 관련해 “한국 사회가 과거의 비극들을 기억하는 관습에 대해서 역사가들이 제대로 논쟁해 만들어지거나 축적된 게 없고 지나치게 친일-반일 프레임화됐다”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여성학 박사는 “여성주의적 접근이 빠지고 민족주의적 방식으로 운동이 변화한 것과 할머니들을 피해자로 고착화하는 시각이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26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성산동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앞 담벼락에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를 형상화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우려와 앞날
전문가와 활동가들은 최근 사태가 자칫 ‘역사수정주의론자’나 우파들의 위안부 지우기 결과로 이어질 것을 가장 우려했다. 권명아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는 “2015년 12·28 합의 이후 역사수정주의자들의 타깃은 ‘한-일 화해를 가로막은 ‘종북좌파민족주의 단체’ 정대협이 피해자의 목소리를 가로막고 있다’로 집중됐다. 이번 사태 역시 이 담론 재편성의 연장이다. 반대로 일부 진보진영은 이를 ‘조국 사태’ 연장으로 보고 옹호하며, 정작 사태의 중요 지점이 보이지 않게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는 “할머니와 활동가를 대결시키는 진실 공방 구도 방식의 접근이나 할머니는 평화를 말하는데 정의연은 반일이다 이런 식의 프레임은 지난 30년 역사를 알지 못하고 이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에서 무라야마 담화 이후 교과서에 위안부 문제가 들어오며 일본 사회에서 엄청난 ‘백래시’가 진행됐다며, 최근 한국의 상황도 비슷하게 전개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실제 이날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 등은 서울 한 호텔에서 ‘정대협의 위안부 운동, 그 실체를 밝힌다’라는 토론회와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 사회에서 위안부에 대해 “오류의 학술과 환상의 이미지가 생겼다”고 또다시 주장했다.
이용수 할머니가 제기한 한-일 청년 교류, 교육 등의 문제는 부족할 순 있어도 정대협과 연구자들이 90년대부터 제기하고 꾸준히 실행해온 것이다. 정의연과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한 전국행동은 ‘희망씨앗기금’ 이름으로 일본 학생들이 한국을 찾아 배우고 오는 프로그램도 매해 실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할머니가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이야기하며 눈물로 호소한 것은 우리 사회가 30년 성과에도 불구하고 ‘법적 책임과 공식사죄’라는 일본에 대한 요구만큼 피해자 개개인의 아픔과 명예회복에 대해 깊이 생각해왔는지 뒤돌아보게 한다.
이용수 할머니의 2차 기자회견 이튿날인 26일 새벽, 경기 광주시 나눔의집에 거주하던 피해자 한분이 또다시 별세했다. 피해자와 유가족의 뜻에 따라 모든 장례 과정은 비공개로 진행된다. 현재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17명으로 줄었다.
김영희 고명섭 박다해 강재구 기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