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혁 ㅣ 전국부장
올해 초 이사하기 전까지 10년 남짓 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방 두 개에 전용면적 59㎡짜리 200여가구로 구성된 자그만 단지였는데, 숲에 둘러싸여 조용한데다 베란다 밖으로는 인왕산이 바라다보이는 전망이 일품이었다. 둘째 딸아이의 내년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어쩔 수 없이 인근에 있는 방 세 개짜리 아파트로 이사하게 됐다. 그런데 인왕산 뷰만큼이나 아쉽고 맘에 걸리는 이가 있었다. 방씨 아저씨였다.
정확한 계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10여년 전 그 아파트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 (훗날 ‘주호 아저씨’라고 부르게 된) 한 경비 아저씨와 친해졌다. 주호 아저씨와 같은 근무조(이분들은 맞교대 근무를 하신다) 전기실 직원이었던 방씨 아저씨와도 덩달아 가까워졌다. 가끔 관리사무소(겸 경비실)에 택배를 찾으러 갔다가 ‘경한 아빠, 소주 한잔할려?’라는 권유에 못 이기는 척 자리를 잡고 앉으면, 전기실에 있던 방씨 아저씨까지 올라와 셋이서 자리를 만들곤 했다.(규정 위반이었겠지만 자그만 이 아파트에서는 주말이나 저녁 시간에 이런 정도는 용인됐다.) 30~40년 나이 차를 뛰어넘은 ‘동네 술친구’였던 셈. 택배 찾으러 간다더니 소식이 없는 아빠 찾으러 아들내미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주호 아저씨는 “경한이 왔구나. 나중에 대학생 되면 이 할아버지랑 꼭 술 한잔하자”며 군것질거리를 사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주시곤 했다. 하지만 주호 아저씨는 몇 년 뒤 갑작스레 일을 그만두셨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뒤 방씨 아저씨가 넌지시 알려줬다. “당시 입주자 대표와 사이가 안 좋아서….”
방씨 아저씨는 무척이나 살가웠다. 6년 전 둘째가 태어난 뒤 하루는 방씨 아저씨가 찾아오셔서 봉투를 쓱~ 내미셨다. “경한 아빠, 잘 생각했어. 애가 둘은 있어야지. 그리고 이번엔 딸이라며, 축하해”란 말과 함께. ‘수입이 얼마나 된다고 이런 것까지….’ 평생 받아본 가장 값진 5만원짜리 봉투였다. 이후로도 방씨 아저씨는 허리가 안 좋으신 아주머니, 마흔 넘어 얻은 늦둥이 아들 걱정에 한숨을 내쉬다가도 우리 아이들만 보면 친손주들 대하듯 반가워하며 안아주거나 머리를 쓰다듬곤 했다.
방씨 아저씨가 격일로 24시간씩 근무하며 숙식을 해결하는 공간인 전기실은 지하 2층 주차장 한쪽에 있었다. 명절이나 연말에 뭐라도 손에 쥐고 아이들과 함께 찾아가면 ‘뭘 또 이런 데까지…’라며 함박웃음을 지으신 채 손수 봉지커피를 타주시곤 했다. ‘위~’ 24시간 돌아가는 변압기 소리에 “이렇게 시끄러운 곳에서 고생이네요”라고 인사를 건네면 “오래돼놔서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늙은이를 누가 써준다고, 일할 게 있으면 다행이지”라는 답이 돌아왔다.
지난 2월 이삿날. 방씨 아저씨는 이삿짐 빼는 작업이 한창인 아파트 복도를 오가며 “아이들 커가는데 넓은 데로 옮겨야지”라면서도 연신 “섭섭해서 어떻게 한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멀리 가는 거 아니니 종종 뵐 겁니다”라고 호기롭게 답했지만, 부끄럽게도 석달이 넘도록 약속은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주호 아저씨와 방씨 아저씨가 떠오른 건, 서울 강북구 한 아파트에서 입주민 갑질에 시달리던 경비원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뉴스를 보고서다. 사실 처음이 아니다. 2014년 10월에도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에서 욕설과 모욕적 대우를 받던 경비원이 분신했다. 왜 이런 일들이 반복돼야 할까? 이런 일이야말로 인재이고, 이를 막을 대책이 필요한 게 아닌가?
‘임시계약직 노인장’의 삶을 담은 책 <임계장 이야기>에서는 아파트 주민들을 소수의 좋은 사람과 다수의 무관심한 사람, 극소수 나쁜 사람, 세 종류로 분류한다. 이 대목에서 뜨끔했다. 극소수 그악스러운 입주민이 설쳐대는 배경에는, 주호 아저씨가 왜 그만뒀는지도 몰랐고 방씨 아저씨와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있는 나 같은 무관심한 다수가 있을 테니 말이다.
뭘 해야 할까. 경비원은 경비 업무만 하도록 하고 재활용품 분리수거나 택배관리, 주차관리 등은 못 시키도록 하자고 청와대 게시판에 청원이라도 해야 하나. 그보다 우선, 방씨 아저씨에게 연락해 식사라도 하자고 해야겠지만.
hy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