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푸른색 덩어리가 내게 신비한 존재가 되기까지

등록 2019-11-16 09:31수정 2019-11-16 11:48

[토요판] 이런 홀로
식물 기르기와 나

식물 하나엔 정교한 자연법칙
‘반려’란 단어보다 높은 차원

자연이 삭제된 도시에서
식물이 주는 즐거움이란
지금의 식물 기르기 트렌드가 개인의 정서적 안정과 우울감 해소와 같은 심리적 테라피를 강조한다면, 거기에는 일정 부분 내가 외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바깥의 유구한 자연과 이어진 존재라는 감각이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더 많은 식물을 되도록 잘 기르는 ‘식물 금손’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지금의 식물 기르기 트렌드가 개인의 정서적 안정과 우울감 해소와 같은 심리적 테라피를 강조한다면, 거기에는 일정 부분 내가 외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바깥의 유구한 자연과 이어진 존재라는 감각이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더 많은 식물을 되도록 잘 기르는 ‘식물 금손’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나는 ‘반려 식물’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뭔가 식물에 붙이기에 부적절한 말처럼 느껴진다. 거기에는 ‘식물이면 그냥 식물이지, 무슨 반려씩이나’ 하는, 트렌드로 소비되는 문화에 눈 흘기는 삐딱한 마음도 있지만, 그보다 내게 식물은 동물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존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짝이 되는 동무’ 정도로 치부하기엔 좀 더 높은 차원이랄까. 훨씬 더 넓은 차원이랄까.

아무튼 지금 식물은 ‘힙’하다. 식물이 ‘힙’의 범주에 들어온 것은 기억하는 한 내 생애 초유의 일이다. 지금 인터넷 서점에서 ‘식물’로 검색하면 2017~2019년에 나온 책들만 300여권에 이른다. 그중 상시적으로 나오던 어린이 책과 도감류의 책들을 빼고 최근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식물 기르기 관련 에세이, 그린 인테리어와 가드닝, 보태니컬 아트 관련 책들만 따져도 수십권이다. 식물에 관한 사람들의 사랑은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가 한순간 갑자기 터져 나온 것처럼 도처에 흘러넘치고 있다. 뭐, ‘고기 먹방’ 같은 게 트렌드인 것보다야 이편이 나을 것이다.

‘힙’의 범주에 들어온 식물

시류에 편승해 나의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내게는 식물의 이름을 알고 싶어서 식물도감들을 사 모으던 시절이 있었다. 전국 각지로 출장을 다녀와 글을 쓰려면 산과 들에 흩어져 있던 나무나 꽃의 이름을 알아야만 했다. 나무 이름에 해박한 전문가와 함께 가면 행운이었지만 대체로 나는 혼자였다. 그래서 그때마다 도감과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누리집을 뒤지며 그 이름을 알아내려 애써야만 했다. 불과 10년쯤 전인데 그때는 카메라만 갖다 대면 물체 정보를 알아서 식별해주는 ‘구글 렌즈’도, ‘모야모’와 같은 식물 이름 찾기 애플리케이션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엔 아무리 도감을 뒤져도 꽃이나 풀의 이름은 알 수 없었다. 내가 본 식물들은 종종 그냥 미지의 상태로만 남아 있었다. 다만 그 이름들을 알아내려고 애쓰는 동안 나는 식물이라는 세계에 조금이나마 눈을 뜨게 되었던 것 같다.

사실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글에 풀 이름 같은 거야 안 써도 그만이었다. 그렇지만 식물의 세계에 눈을 뜬 이후에는 점점 더 많은 것이 궁금해졌다. 순전히 호기심으로 길에서 본 식물들의 이름과 특성들을 알아갔고, 필요와 관계없이 도감을 사 모으며 나무와 풀들의 목록과 도감을 지은 이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도감을 지은 이들은 대부분 나무를 좋아해서, 꽃에 미쳐서 스스로 전국 산하를 돌아다니며 수년 동안 사진을 찍고 정보를 수집한 자들이었다. 이들이 쓴 딱딱하고 촌스러운 서문 같은 것을 보면, “장식적인 사진과 그에 비해 거칠더라도 해당 식물의 특징이 잘 나타난 사진 중 택일해야 하면 한참을 고민하다가도 결국 후자를 선택하곤 했다”와 같은 단순한 말들 뒤로 그들이 발로 밟고 눈으로 보았을 수많은 계절과 공간이 떠올랐다.

그전까지 그저 푸른색 덩어리에 불과했던 나무와 풀들은 이제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자 서로 다른 생태와 생존 방식을 가진 신비한 존재였고, 지구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이상한 모듈 결합체였다.

그러는 동안 때로 까마득히 멀어져 있던 어린 시절의 식물과 관련한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찍어온 사진 속 식물의 잎맥과 꽃잎이 난 모양 같은 것을 도감과 비교하며 어느 순간 초등학생 시절 ‘자연관찰대회’라는 것에 나갔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 대회란 것은 그저 몇시간 동안 학생들을 어느 자연에 풀어놓고, 하나의 탐구 주제를 정해 그 식물에서 발견하고 관찰한 것들을 하나하나 번호를 매겨 그림으로 그리고 적어나가는, 지금 생각하면 아주 귀여운 대회였다.

생각해보면, 식물 하나하나에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자연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이 그때였다. 식물은 몸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인 동물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겉보기에 제멋대로인 식물들은 자세히 보면 이파리 하나, 꽃술 하나에도 전체 자연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바라보고 적는 동안 다른 생각을 할 겨를 없이 즐거웠다. 나는 자연이 삭제된 도시에서 사는 동안 그 즐거움을 깊숙한 곳에 구겨둔 채 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식물 금손’이 되고픈 욕망

내가 지금 조금이라도 식물과 자연에 대한 공감의 감각을 갖고 있다면 이때 산으로 들로 걸어 다니고, 나무와 풀과 꽃들을 찾아보던 1년 남짓한 경험 덕분일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본래 내게 존재했을 자연에 대한 감각을 되살려주었다.

내가 내 의지로 집에 식물을 들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다. 그전에도 선물받은 몇가지 식물을 키워봤지만 별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고 대부분 빠르게 죽어나갔다. 많은 이가 그렇듯 나도 별수 없이 식물을 죽이는 사람 쪽이었다. 때마다 꽃시장에 가서 마음에 드는 식물을 하나둘 들여놓는 것을 보며 주변 사람들은 혀를 차곤 했다. 그러면 나는 이번에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이것들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사계절 변화에 따라 잎을 내고 꽃을 피우게 하리라 다짐했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그들의 특성을 익히고 각자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일에 열렬히 집중했다. 그 일은 생각보다 놀랍고 즐거웠다. 일대일로 정성을 기울이는 일은 바깥의 식물을 바라보는 것과는 또 다른 발견의 연속이었다. 물·햇빛·바람과 식물의 놀라운 직접적인 관계, 모든 식물은 내가 보지 않을 때만 잎을 틔우거나 꽃을 피운다는 사실. 즉, 식물은 정지해 있지만 실은 단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사실, 모든 조건이 맞았을 때의 공포스러운 성장 속도.

그러나 식물을 기르는 기술은 아주 조금씩만 발전했다. 한때는 매화 분재를 들여놓고 봄이 되자 피어나는 꽃을 보기도 했고, 싹이 난 고구마를 심어 키워 작지만 고구마를 수확하기도 했다. 유행했던 모든 독특한 식물들-몬스테라, 아가베 아테누아타, 유칼립투스, 테이블야자, 마오리 소포라-도 내 집에 한동안 살았다. 그러나 곧 각기 다른 알 수 없는 이유로 시름시름 앓다가 1~2년 안에 죽어버렸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지금 내 집에는 몇 가지 식물들만 살아남아 있다. 벵골고무나무, 스킨답서스, 금전수, 수국,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나무 하나, 그리고 베란다의 기다란 화분에 아무렇게나 심어놓은 돌나물 정도다. 부끄럽게도 모두 생명력이 좋기로 소문난 것들뿐이다.

그러나 소박한 잡초 같은 그들은 내게 자연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지 않게 해주며, 바깥의 자연으로 내 외연이 확장되는 것을 도와준다. 마치 아이를 키우면 세상의 모든 아이로, 고양이를 키우면 세상의 모든 고양이로 나의 공감 능력이 확장되듯이 말이다. 지금의 식물 기르기 트렌드가 개인의 정서적 안정과 우울감 해소와 같은 심리적 테라피를 강조한다면, 거기에는 일정 부분 내가 외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바깥의 유구한 자연과 이어진 존재라는 감각이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더 많은 식물을 되도록 잘 기르는 ‘식물 금손’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다이나믹 닌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속보] 헌재, ‘마은혁 불임명’ 헌법소원 선고 연기…10일 변론 1.

[속보] 헌재, ‘마은혁 불임명’ 헌법소원 선고 연기…10일 변론

[단독] 윤석열 쪽, ‘계엄 폭로’ 홍장원 통화기록 조회 요청 2.

[단독] 윤석열 쪽, ‘계엄 폭로’ 홍장원 통화기록 조회 요청

[속보] ‘이재용 불법승계’ 2심도 무죄…검찰 증거 또 불인정 3.

[속보] ‘이재용 불법승계’ 2심도 무죄…검찰 증거 또 불인정

경찰, 김성훈·이광우 업무·개인 휴대전화 모두 확보 4.

경찰, 김성훈·이광우 업무·개인 휴대전화 모두 확보

경찰, 고 MBC 오요안나 ‘직장 내 괴롭힘’ 의혹 내사 5.

경찰, 고 MBC 오요안나 ‘직장 내 괴롭힘’ 의혹 내사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