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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독일, 일선 판사들이 행정 참여… 사법농단 설 자리 없다

등록 2019-11-08 21:28수정 2019-11-13 02:45

[사법개혁, 길을 묻다 - ① 독일]

독일 법관기구로 ‘밀실행정’ 차단
주법무부가 법관 대표위원들에게
인사 대상자 전문성 등 의견 요청
부적격자 임명 강행 어려운 구조
주차장 배분 등 복지문제도 공유

한국은 갈 길 먼 판사 독립
법원 16곳 사무분담위 설치하고
사법행정자문회의도 출범했지만
아직 내규나 대법원 규칙에 근거
누구도 간섭 못 하게 법제화 필요

2017년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이 드러나면서 법원 개혁 도화선에 불이 지펴졌습니다. 그해 9월 김명수 대법원장이 스스로를 “개혁의 상징”이라 칭하며 대법원장에 취임했지만, 기대와 달리 대법원은 현재 미온적인 ‘셀프 개혁’만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조국 사태’를 거치며 검찰 개혁은 국민적 관심사가 됐지만, 법원 개혁은 대중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한겨레>는 더 나은 법원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9~10월 독일·미국·프랑스·일본 등 네 나라를 현장 취재했습니다. 첫 사례는 다수 판사들이 주요 정책 결정에 참여해 권력을 나눈 독일 법원 이야기입니다. 미국·프랑스·일본에서도 사법개혁의 주요 ‘이정표’들을 찾아 소개합니다.

지난달 8일 독일 헤센주 프랑크푸르트 지방법원에서 만난 빌헬름 볼프 법원장.
지난달 8일 독일 헤센주 프랑크푸르트 지방법원에서 만난 빌헬름 볼프 법원장.

“법원장인 저도 한 표만 행사할 수 있어요. 피고인 부탁에 넘어가려야 넘어갈 수 없죠. 흔들릴 이유도, 권한도 없어요.”

독일 헤센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프랑크푸르트 지방법원, 지난달 8일 만난 빌헬름 볼프 법원장은 ‘법원운영위원회’(법원운영위) 의장을 맡고 있다. 법원운영위는 각급 법원에 설치된 법관대표기구로, 사무분담을 결정한다. 사무분담은 형사·민사·영장전담 등 재판 업무를 나누고, 어떤 판사가 어느 재판부에 배치될지, 사건은 어떻게 배분할지 정하는 절차다. 예를 들어, 살인 혐의 피고인 성의 첫 글자가 엠(M)이라면 ○○합의부에 배당하자고 합의하는 식이다. 사무분담은 특정 판사에게 특정 사건을 맡기는 것을 막아 법관 독립의 핵심 요소로 꼽힌다.

볼프 의장처럼 법원장은 당연직으로 법원운영위 의장을 맡지만, 다른 판사들과 대등한 위치에 있다. 다수결을 따르기 때문이다. 나머지 법원운영위 위원들은 모두 동료 판사들이 뽑는다. 법원 규모에 따라 구성원 수가 다른데, 프랑크푸르트 지방법원에서 일하는 150여명의 판사는 자신들을 대표할 10명의 위원을 뽑게 된다. 임기는 4년이다. 이들은 연말이 되면 사무분담에 관한 판사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내년 한 해 사무분담을 짠다.

그래도 한 법원의 수장인데, 법원운영위에서 볼프 의장의 입김이 더 세지 않을까. 그는 웃으며 말했다. “저는 법원운영위 의장으로서 법원운영위에서 지렛대 역할을 하긴 하지만, 딱 거기까지예요. 저도 그게 오히려 부담이 적어요. 어떤 판사가 사무분담을 비판하면 저는 ‘미안하지만, 이건 여러분이 직접 선출한 10명의 법원운영위가 결정한 일입니다’고 말할 수 있잖아요.”

지난달 8일 독일 헤센주 프랑크푸르트 지방법원에서 만난 빌헬름 볼프 법원장이 프랑크푸르트 지방법원의 사무분담을 정리한 책자를 보며 법원운영위원회 운영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지난달 8일 독일 헤센주 프랑크푸르트 지방법원에서 만난 빌헬름 볼프 법원장이 프랑크푸르트 지방법원의 사무분담을 정리한 책자를 보며 법원운영위원회 운영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 판사 대표들이 머리 맞대 ‘사무분담’ 논의

판사 개개인은 독립적이다. 입법부·행정부 등 법원 외부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법원 내부 압력에도 그럴까. 개개인이 독립된 사법기구라는 판사는 사무분담, 임용·전보 등 사법행정의 대상이기도 하다. 독립돼 있으면서도, 종속돼있는 이중지위의 딜레마는 판사의 독립을 위협한다. 사법농단 사태가 그랬다. 사법행정 권한을 쥔 대법원 법원행정처 수뇌부는 이를 무기로 일선 재판에 개입하려 했고, 불이익을 우려한 판사들은 윗선 지시에 따라 부적절한 문건을 작성하거나 선고 기일을 연기했다.

독일은 다르다. 소수가 사법행정 권한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법관대표기구를 통해 주요 정책 결정에 판사들이 참여한다. 사법행정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다.

독일 하노버 지방법원은 지난 9월 법원운영위 정기 회의를 열었다. 형사합의18부에서 일하던 멜리히 판사가 대학교수가 돼 사무분담 재조정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소년재판부에 있는 스테판 판사가 형사합의부로 옮겨 가길 희망했다. 법원운영위 소속 판사 11명은 회의를 열어 스테판이 멜리히 판사 자리로 옮겨가도 좋을지 토론했다. 병가와 육아휴직, 퇴직, 파견으로 빈 자리가 생기거나 새로운 판사가 임용되면 정기회의로 사무분담을 재조정하는데, 이런 변동이 올해만 10여번 있었다고 한다.

선출된 판사들이 모여 토론하기 때문에 사법행정권자의 자의적 사무분담은 불가능하다. 지난달 10일 독일 하노버 지방법원에서 만난 안드레 빌케닝 판사(법원운영위 지원 업무)는 “법원 구성원이 원하는 바가 저마다 다르다. 권위적으로 누구 한 사람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존중하고 만족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개인 성향과 적성, 희망, 업무 효율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결정하게 된다”고 말했다.

지난달 10일 독일 하노버 지방법원에서 만난 안드레 빌케닝 판사. 법원운영위원회를 지원하는 행정 업무를 맡고 있다.
지난달 10일 독일 하노버 지방법원에서 만난 안드레 빌케닝 판사. 법원운영위원회를 지원하는 행정 업무를 맡고 있다.

지난달 10일 독일 하노버 지방법원에서 만난 안드레 빌케닝 판사가 보여준 하노버 지방법원 사무분담 표.
지난달 10일 독일 하노버 지방법원에서 만난 안드레 빌케닝 판사가 보여준 하노버 지방법원 사무분담 표.

■ 승진·전보 등 인사도 ‘내 맘대로’ 사법행정 견제

독일 법원은 행정부에 속해 있다. 사법부, 행정부, 입법부가 분리된 한국과 다르다. 국민들이 선출한 입법부가 행정부를 구성하고 행정부는 법원을 관할한다. ‘입법부(국회의원)→행정부(장관)→법원’으로 이어지는 ‘민주적 사슬’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법원에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구조다. 사법행정권한은 연방장관이나 주장관에게 주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행정부가 사법행정 권한을 자의적으로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판사들이 법관대표기구로 ‘견제와 균형’의 묘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법관협의회와 법관대표인사위원회가 그렇다. 명망있고 전문성있는 선출된 판사로 구성되는데, 판사 인사나 복리후생 문제에 목소리를 낸다. 한국으로 치면, 대법원장의 인사권을 위원회 형태로 견제하는 것과 같다.

지난달 8일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쾰른고등법원에서 만난 후베르투스 놀테 판사. 쾰른고등법원 법관협의회 의장을 맡고 있다.
지난달 8일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쾰른고등법원에서 만난 후베르투스 놀테 판사. 쾰른고등법원 법관협의회 의장을 맡고 있다.

쾰른고등법원.
쾰른고등법원.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쾰른고등법원 법관협의회는 2015년 법원장에게 한 가지 요청을 보냈다. 승진코스로 여겨지는 행정 업무에 누가 어떤 기준으로 배치되는지 더 투명하게 공개하라고 법원장에게 요구한 것이다. 주 법무부로부터 사법행정 권한을 위임받은 법원장이 행정업무 담당자를 임명하는데, 공석이 있는지, 누가 어떤 기준으로 배치됐는지 이전에는 알기 어려웠다고 한다. 법관협의회 요구로 법원 쪽은 2016년부터 행정업무 담당 판사를 선발하기 전에 판사들에게 전체 메일을 보내 그 소식을 알리고 있다. 법관대표기구가 밀실형 사법행정을 저지한 결과다.

“판사 독립성을 침해하는 일이 생길 때 전면에 나서게 되죠. 부당한 사법행정, 노동환경 개선, 인사 문제에 관해 조직체로서 의견을 낼 수 있어요. 개개인 판사들이 행정소송을 낼 수도 있지만 부담되죠. 법관협의회가 그 대신 사법행정권자에게 특별한 조치를 취해달라고 주장할 수 있어요.” 지난달 8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쾰른에서 만난 후베르테스 놀테 판사가 말했다. 그는 시장법·경쟁법·저작권법 재판을 담당하면서 쾰른고등법원 법관협의회 의장 업무를 병행하고 있다.

법관협의회는 일종의 ‘직장협의회’인데, 주마다 형태와 기능이 다르다. 7명으로 구성된 쾰른고등법원 법관협의회는 판사 인사, 복리후생 전반에 의견을 낸다. 한 해 네 차례 사법행정권자와 만나 ‘승진 대상은 누구인지’와 같은 인사 관련 정보를 전달받는다. 법관협의회 의견에 구속력은 없지만, 의사 결정을 내리기 전 관련 정보를 전달하고 의견을 묻는 것만으로도 인위적인 사법행정을 막을 수 있다. 이에 더해 노동시간, 임금, 휴가계획 등 복리후생 문제를 법원과 함께 결정한다. 주차장 공간을 배분하거나 사무실에 새 가구를 들여놓는 일 등 소소한 문제도 포함된다. 판사들은 의사결정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된다.

판사 임명·승진 등 인사 문제에 집중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법관대표기구로 법관대표인사위원회도 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법무부에서 파견 근무하는 크리스티안 무더스 판사 말에 따르면,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경우 법관대표인사위원회는 주 단위에서 분야별 법원마다 하나씩 설치돼있다. 위원장인 법원장급 한 명을 포함해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데, 이들 또한 동료들이 직접 선출한다.

주 법무부가 판사의 승진·전보에 의견을 요청하면, 법관대표인사위원회는 해당 판사의 성품, 전문성 등에 대한 의견을 낸다. 어떤 판사가 쾰른고등법원장이 될 자격이 충분 혹은 불충분하다는 식이다. 구속력은 없어도 ‘자격 부족’이라고 의견을 낸 판사 인사를 그대로 밀어붙이기에 부담이 된다. 마음에 들지 않는 판결을 했다고 해서 한직으로 보내는 것 또한 불가능해진다.

지난달 9일 독일 뒤셀도르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법무부에서 만난 크리스티안 무더스 파견 판사.
지난달 9일 독일 뒤셀도르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법무부에서 만난 크리스티안 무더스 파견 판사.

■ 한국, 느리지만 점진적 변화 “법으로 정해놔야”

한국에서 사법행정은 ‘제왕적’, ‘독점적’, ‘수직적’이란 수식을 받는다. 피라미드 형태로 소수의 결정권자에게 사법행정권한이 쏠려 있기 때문이다. 한곳에 쏠린 사법행정권한은 법원 안팎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판사의 독립을 위협한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대법원 판단에 반하거나 사법행정에 쓴소리한 판사를 찍어 인사 불이익을 주려 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법원 밖도 다르지 않다. 사법행정권한이 한 곳에 몰려있으면, 법원 외부 세력이 청탁의 연결고리를 찾는 게 쉬워진다.

법원이 내·외부의 압력에서 벗어나야만 법과 양심에 따른 ‘좋은 판결’이 가능하다. 사법행정권한이 흩어지고 분산돼야 할 이유다. 법관대표기구는 주요 정책 결정과정에 판사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 판사들이 직접·비밀 선거로 대표 판사를 뽑고, 그렇게 선출된 이들이 법관대표기구를 구성해 사법행정권한을 견제하는 식이다.

미미하지만 변화는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의 유·무죄를 따지는 형사재판이 진행 중이고, 법원 개혁도 느리지만 점진적으로 해나가고 있다. 독일의 법원운영위원회를 본떠 올해 적어도 국내 법원 16곳에 사무분담위원회가 설치됐다. 판사 회의기구인 전국법관대표회의는 의견 수렴기구로 자리잡아가고 있고, 대법원도 최근 사법행정자문회의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이런 조직들은 내규나 대법원 규칙에 근거하고 있다. ‘연방법원이든 법무부 장관이든 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다’는 독일과 대비된다. 확고한 제도화를 위해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독일에도 사법부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들이 있을 수도 있죠. 하지만 권력 자체가 분산돼있기 때문에 그런 위험성이 훨씬 덜 해요. 한국의 상황을 알 수 없지만, (재판과 제도 개혁 시도와 같은) 그런 일을 하고 있다면 잘못된 것을 제재하고 메커니즘이 살아 있다는 뜻이니까 희망적이지 않을까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무더스 판사의 말이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2019년 기획취재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2019년 기획취재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쾰른·뒤셀도르프·하노버·베를린/글·사진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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