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이 드러나면서 법원 개혁 도화선에 불이 지펴졌습니다. 그해 9월 김명수 대법원장이 스스로를 “개혁의 상징”이라 칭하며 대법원장에 취임했지만, 기대와 달리 대법원은 현재 미온적인 ‘셀프 개혁’만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조국 사태’를 거치며 검찰 개혁은 국민적 관심사가 됐지만, 법원 개혁은 대중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한겨레>는 더 나은 법원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9~10월 독일·미국·프랑스·일본 등 네 나라를 현장 취재했습니다. 첫 사례는 다수 판사들이 주요 정책 결정에 참여해 권력을 나눈 독일 법원 이야기입니다. 미국·프랑스·일본에서도 사법개혁의 주요 ‘이정표’들을 찾아 소개합니다.
지난달 8일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쾰른고등법원에서 만난 후베르투스 놀테 판사는 쾰른고등법원 법관협의회 의장과 법관직무법원 판사를 겸하고 있다.
“사건 처리 속도를 높여달라.” 2012년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카를스루에고등법원의 토마스 슐테켈링하우스 판사는 법원장에게 이같은 직무감독 지시를 받았다. 슐테켈링하우스 판사의 사건 처리율이 2008~2010년 다른 판사 평균치의 68%에 그친 탓이다. 그러나 슐테켈링하우스 판사는 ‘사건을 더 철저하게 들여다보다 보니 시간이 더 오래 걸린 것인데 부당한 직무감독으로 독립성이 침해당했다’며 법관직무법원에 소송을 냈다. 1·2심은 ‘법원장 지시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지만 2017년 5월 연방일반법원은 ‘적정 업무량이 어느 정도인지 설명이 부족하다’며 다시 살펴보라고 사건을 2심인 고등직무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독일 판사는 사법행정권자의 행정 조치로 판사 독립성이 침해됐다고 생각하면 법관직무법원에 소송을 낼 수 있다. 독일법관법에 따라 설치된 법관직무법원은 판사를 대상으로 한 직무감독에 대한 이의, 전보, 파견, 징계 결정의 정당성을 따진다. 사법행정권 오·남용을 견제하는 ‘법원 속의 법원’인 셈이다.
지난달 8일 방문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쾰른고등법원의 전경.
동료 판사의 눈으로 사법행정 권한의 오·남용을 가려낸다. 법관직무법원은 각 주마다 1심 직무법원과 고등직무법원이 설치돼있고, 연방일반법원에서 3심까지 다툴 수 있다. 1심 직무법원은 3명, 고등직무법원은 5명의 판사로 꾸려지는데 재판장과 각 절반의 상임·비상임배석판사로 구성된다. 이중 재판장과 배석판사는 법관대표기구인 법원운영위원회가 정하게 된다.
퀼른고등법원 후베르투스 놀테 판사는 쾰른고등법원 법관협의회 의장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법관직무법원 소속 판사를 겸하고 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법관직무법원 1심은 뒤셀도르프 지방법원에, 2심은 함 고등법원에 설치돼있는데, 그는 함고등법원 법관직무법원에 접수된 사건을 맡는다. 사건은 1년에 5건 정도로 많지 않다고 한다. “만약에 제가 부당 해고를 당한다면, 직무법원에 가서 독립된 판사에게 판단을 구할 수 있어요. 재판 당사자도 판사고 저도 판사죠. 직무감독이 판사 독립을 침해했는지 재판을 통해 양쪽이 승복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듭니다. 법관직무법원은 판사의 독립을 보호하는 중요한 기관이에요.”
독일 판사들은 성품, 전문성 등을 주기적으로 평가받는데, 직무감독의 외피를 쓴 독립성 침해 행위가 벌어질 수 있다. 이때 법관직무법원의 존재는 판사들의 든든한 뒷배가 된다. 법관직무법원에 축적된 사례들이 사법행정권의 정당한 행사와 오·남용을 구별하는 살아있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2019년 기획취재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쾰른·뒤셀도르프·하노버·베를린/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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