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밤에 내 집의 도어록을 열려고 시도했다. 세번째 시도를 하는 와중에 상대방은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포기하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보조 문고리를 단단히 걸고 뒤늦게 인터폰을 확인해봤다. 문을 열고 밖을 살펴볼 용기까지는 없었다. 게티이미지뱅크
최근 유튜브에 이른바 ‘신림동 피에로’ 영상(어떤 사람이 피에로 가면을 쓴 채 원룸의 도어록을 누르고 택배를 훔치는 모습이 담김)이 등장했다. 혼자 사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연일 보도되는 상황에서 섬뜩한 일이었다. 한데 그 뒤 알려진 결론은 허무함을 넘어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생계가 어려워 절박한 심정으로 시작한 한 스타트업의 노이즈 마케팅이었단다. 즉, 자작극이었단 말이다. 미국의 공포영화 <할로윈>(1978)이나 <해피데스데이>(2017)를 감명 깊게 봤는지 모르지만 참 정성스럽게도 노이즈 마케팅을 시도했다. 사람들의 공포를 유발해 사업 홍보에 활용하겠다는 발상, 그 자체로 이건 엄연한 범죄이고 폭력이다. 단순히 재밌는 놀이나 깜짝카메라 정도로 생각했다면 정말 크나큰 오산이다.
혼자 사는 이들에게 공포는 불현듯 찾아온다. ‘내가 너무 몰입해서 흥분했나’ 싶어 스스로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지가 않다. 혼자 사는 남성에게도 공포의 순간은 느닷없이 찾아오곤 한다. 당신과 당신 주변의 누군가에게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 내 도어록을 눌렀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점프하듯 침대에 몸을 던지는 순간이다. 퇴근 뒤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운동을 하고 나서 찬물에 샤워를 하고 정해진 의식인 양 리모컨을 손에 쥐고 침대로 향한다. 기나긴 하루의 긴장을 풀며 내 몸이 가장 기다린 그 시간이다. 마치 목줄을 찾아 든 순간 산책을 직감한 강아지가 펄쩍펄쩍 뛰는 것처럼 내 신체는 그 설렘에 기분 좋게 반응한다.
지난주 어느 날, 밤 11시 즈음이었다. 불을 끄고 블라인드를 올리며 한 손에 리모컨을 쥐고 있었다. 내 몸은 이미 침대를 향하고 싶어 조급해했다. 그 순간, 문밖에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리더니 놀랍게도 내 집의 도어록을 누르기 시작했다.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누군가 실수로 눌렀겠지’라고 믿으며 애써 태연하려 했으나 내 발은 어정쩡한 자세로 침대에서 문 쪽으로 방향을 바꿔 경계태세를 취했다. 잠가둔 도어록은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 상대방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한번 더 시도했다. 이쯤 되면 상황이 꽤 심각한 건가 싶었다. 그냥 실수가 아니라 의도가 있는 시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휴대폰을 찾아 112의 번호가 무엇인지 열심히 생각했다.(그렇다, 112의 번호는 112지만 그 짧은 순간에는 그냥 112를 누르면 되는 것인지 단순한 생각조차 쉽지가 않았다.) 다행히 두번째 시도도 무위에 그쳤다. 그런데 상대방은 집요하게 또다시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세번째 시도를 하는 와중에 상대방은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포기하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보조 문고리를 단단히 걸고 뒤늦게 인터폰을 확인해봤다. 도어록을 열고 문밖을 살펴볼 용기까지는 없었다.
술 취한 누군가의 실수였다고 내 자신을 달래며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누군가의 그 시도는 평온하고 소중한 내 하루의 마무리를 완전히 망가뜨렸다. 한동안 심장이 콩닥거려 쉬이 잠에 들지 못했다. 며칠간 집을 드나들 때 주변을 둘러보며 재빠르게 집에 들어가곤 했다. 결코 남성인 내가 온전히 공감하기 힘들겠지만, 같은 상황에서 여성들이 느낄 공포와 불안은 훨씬 더 상상을 초월하리라.
내가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하루는 조금 늦은 저녁, 밖에서 조깅을 하고 집에 들어가는 길이었다. 땀에 전 상태로 빨리 집에 들어가 샤워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조금 멀리서 한 여성이 걸어가고 있었지만, 나는 별 의식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집이 가까워지면서 그 여성은 나와 목적지가 같음을 느꼈는지, 성큼성큼 걸어오는 나를 의식하는 듯한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난 급하게 속도를 줄였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그 여성을 더 경계하게 만든 듯싶었다. 아뿔싸. 어쩌다 보니 같은 건물에 사는 여성이었다. 앞서 공동 현관 앞에 도착한 그 여성은 황급히 비밀번호를 누르고 도망치듯 뛰어들어갔다. 일부러 그 여성이 들어가고 난 뒤 문이 닫히길 기다렸다 다시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웬만하면 공동 현관에 따라 들어섰겠지만, 여성이 공포를 느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속도를 늦췄는데도 먼저 들어간 그 여성은 아직 공동 현관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자 흠칫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평소에 사람들이 이용하지 않는 비상·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억울함에 그저 헛웃음이 나왔다. 괜한 오해를 받은 것에 대해 여성에게 가서 적극 해명하고 싶었으나 그러면 안 되는 일이었다. 워낙 흉흉한 일이 많아 여성의 경계와 조심은 당연한 것이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때때로 내가 여성들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하는 이런 순간들이 본의 아니게 있다. 이런 일은 여전히 적응하기 힘들고, 또 다른 의미에서 ‘공포’로도 다가온다. 누군가에게 내가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공포감. 참 어렵고 힘든 순간이다.
수년 전 자취를 하던 건물의 주인아저씨가 어이없는 부탁을 해온 적이 있었다. 아저씨의 전화를 무심코 받았는데, ‘마스터 번호를 알려줄 테니 어느 집 창문을 좀 닫아달라’는 부탁을 내게 해왔다. 그날 태풍이 올라오는 날씨였는데, 장기간 집을 비운 어떤 방 사람이 주인아저씨에게 부탁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주인아저씨도 일정상 당일에는 이 건물에 올 수가 없다고 했다. 아저씨는 가장 오래 살고 있는 나를 신뢰해서라는 이유를 굳이 덧붙였다. 수차례 곤란함을 표했지만 아저씨의 완강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받아들였다. 어쩔 수 없는 부탁에 문을 열고 들어간 그 집은 한눈에도 여성이 사는 집이었다. 구조를 알고 있기에 서둘러 눈을 감다시피 창문 쪽으로 뛰어가 문을 닫고 도망치듯 그 집을 빠져나왔다. 불쾌하고 화가 났다. 지금 같으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 부탁이었지만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아저씨는 건물주였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부탁을 한 여성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어떤 남자가 자신의 방에 드나들었다는 걸 알았다면 얼마나 기분이 나빴을까. 그곳에 사는 내내 공포와 경계심을 애써 눌러가며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혼자 살면서 느끼는 행복과 즐거움은 많다. 그런데 이처럼 문득문득 찾아오는 공포와 불편함의 순간들을 마주할 때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남성이라도 혼자 살면서 공포를 느끼는 순간이 있다. 물론 남성의 공포를 여성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거나 배려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공포를 느낄 때면 남성으로서 조금 더 조심해야겠다는 다짐을 스스로 하게 된다. 그러니 제발 멍청한 노이즈 마케팅 따위의 생각은 당장 쓰레기통에 버리길.
고독한 산세베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