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100억원대 자산가인 70대 여성 김아무개씨가 치매 판정을 받았다. 김씨 재산을 놓고 세 형제 사이에 눈치 싸움이 벌어졌다. 사업에 실패한 둘째 아들이 그해 10월 자신을 모친의 성년후견인으로 지정해달라고 서울가정법원에 ‘성년후견개시 심판’을 청구했다. 곧 첫째 아들도 같은 내용의 신청서를 법원에 냈다. 최근 가정법원은 사업에 실패한 둘째 아들 대신 공무원인 첫째 아들을 김씨의 후견인으로 지정했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유명세를 떨쳤던 유진 박씨는 2000년대 중반 조울증을 앓으며 활동이 뜸해졌다. 2016년 6월 박씨의 이모가 법원에 본인을 조카의 성년후견인으로 지정해달라고 신청했다. 법원은 이듬해 6월 이모가 아닌 한 복지재단을 박씨의 성년후견인으로 지정했다. 그러자 박씨의 매니저가 박씨 이모를 설득해 성년후견인 신청을 취하하도록 했고, 성년후견인 지정은 없던 일이 됐다. 지난 5월 박씨의 매니저는 박씨의 재산 7억여원을 가로챈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성년후견인 신청자가 빠르게 늘면서 동시에 신청 취하 사례도 급증하고 있다. 고령화 여파로 치매 노인 등이 증가하면서 성년후견인 신청이 늘었지만, 원하는 대로 성년후견인이 지정되지 않을 경우 ‘신청 취하’를 통해 아예 ‘판’을 깨버리는 사례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성년후견인 제도는 질병·고령 등으로 사무처리 능력이 떨어진 성인에게 후견인을 지정해, 본인 대신 재산을 관리하고 치료·요양 등을 받을 수 있도록 돕게 하는 제도로 2013년 도입됐다. 지난해 성년후견인 신청 건수는 5927건으로 전년도(4571건)보다 29.7%, 2014년(1967건)보다 3배 늘었다. 신청 뒤 취하 건수도 2014년 402건에서 2017년 837건, 2018년 894건으로 느는 추세다.
문제는 신청 취하가 법원의 성년후견인 지정 결정에 불복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는 점이다. 성년후견인 지정을 신청하면 친족이 지정되는 경우가 많지만, 친족 간 다툼이 심하거나, 피후견인의 재산을 빼돌릴 위험이 있어 보이면 법원은 변호사나 복지재단 등 제3자를 성년후견인으로 지정한다. 이는 전체의 15%가량을 차지한다. 이 경우 이해관계가 틀어진 신청인이 신청을 취하하면 성년후견인 지정은 무산된다. 민사·행정소송 등은 상대방 동의 없이는 소를 취하할 수 없지만, 상대가 없는 성년후견개시 심판은 결과가 나온 뒤에도 불복 절차 없이 취하가 가능하다.
이런 문제점이 지적되자 법무부는 지난해 3월 성년후견인 신청 심리가 시작되면 법원의 허가가 있어야만 신청 취하가 가능하도록 가사소송법 개정안을 냈다. 하지만 국회가 공전하면서 개정안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엄경천 변호사(법무법인 가족)는 “치매 등 문제가 생기기 전에 후견인은 누구로 할지, 어떤 권한을 줄지 미리 정하는 임의후견 제도가 있다. 보험을 들듯이 제도를 활용하면 갈등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