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부터 9월까지 한민수(가명)씨 어머니가 지냈던 세번째 요양원 노인들이 일부 요양보호사로부터 학대당한 모습.
2018년 말 기준 한국의 65살 이상 노인 인구는 739만명이다. 추정 치매 환자는 75만명가량이다. 지난해 건강보험료 등에서 노인 요양에 지출된 재정은 모두 6조6758억원이다. 노인 인구는 2025년 1천만명, 2035년 15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은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다.
‘대한민국 요양 보고서’ 1부는 요양원에서의 한달 근무와 재가방문요양보호사(방문요양보호사) 심층 인터뷰를 통해 노인 돌봄의 그림자를 다뤘다. 2부는 2회에 걸쳐 요양원 비리에 본격적으로 접근한다. 1회에서는 2017년 3월부터 2년 동안 서울에서 치매 어머니와 요양원 4곳을 전전해야 했던 한 아들의 깊은 속내를 들여다보고,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장기요양기관을 고발하고 수사 의뢰한 사건 가운데 확정된 판결문 39건도 단독 입수해 분석했다.
엄마의 몸에 멍이 나 있었다. 한민수(가명·57)의 머릿속에 언뜻 떠오른 생각이 있었지만 애써 고개를 저었다. ‘어딘가에 부딪혔겠지.’ 중증 치매를 앓는 엄마니까 넘어졌거나 어디에 부딪혔을 거라고 믿었다. 그것은 이미 한차례 옮겨온 이 요양원이 나쁜 곳이어서는 안 된다는 한민수의 자기합리화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의지를 꺾는 증거가 자꾸만 생겼다. 엄마를 보러 올 때마다 멍이 늘어난 것이다. 곰곰이 따져보니 특정 요양보호사가 근무하는 날마다 자주색 멍이 생겼다. 멍이 파란색, 보라색, 녹색으로 바뀌어 사라질 때쯤이 되면 그 요양보호사의 근무가 돌아왔고, 엄마의 몸에 새로운 멍이 생겼다.
요양원에서 엄마에게 위층으로 방을 옮기라고 권유한 적이 있다. 엄마는 위층에 남자 어르신이 많다고 거절했다. 한민수가 되짚어보니 엄마의 몸에 멍이 들기 시작한 시점이 그때쯤이었다. 화가 났다. 그러나 한민수는 화를 삭여야 했다. 화를 내거나 사실관계 확인을 위해 시시티브이(CCTV)를 보여달라고 하면, 한민수가 방문하는 짧은 순간을 빼고 대부분의 시간을 요양보호사와 함께하는 엄마가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나는 부모를 요양원에 보낸 죄인’이라고 되뇔 뿐이었다.
2017년 초까지만 해도 한민수는 엄마와 함께 살았다. 노인주간보호센터에서 오전 9시에 엄마를 데려갔다가 오후 4시에 집 근처까지 데려다줬다. 그런데 사고가 터졌다. 어느 날 오전, 엄마를 데려가는 센터 차를 기다리다가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참이었다. 엄마가 사라졌다. 방에도, 옥상에도, 집 밖에도 엄마는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었다. “뚜르르르르.” 신호음이 흐르는 몇초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짧은 안도가 지나간 자리를 치밀어 오른 화가 채웠다. 입술을 꾹꾹 깨물며 입을 뗐다.
“엄마 어디세요?”
“나 센터 가고 있어.”
옆에 있는 사람을 바꿔달라고 한 뒤 상황을 설명했다.
“저희 어머니께서 치매가 있으신데 혼자 무작정 지하철을 타셨네요. 가야 할 방향도 아닌데….”
다행히 전화를 건네받은 이가 엄마를 반대 방향 지하철로 안내해줬다. 그분이 다른 승객에게 사정을 이야기했고, 그 승객은 한민수가 기다리고 있는 지하철역에 엄마를 데려다줬다. 우여곡절 끝에 엄마를 찾아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한민수는 생각했다. ‘이제 더는 예전과 같을 수 없겠구나.’
그렇게 짧은 실종 상태가 몇차례 더 있었다. 그것은 엄마의 치매가 중증으로 치닫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는 몇년 전 아내와 이혼했다. 아들 둘은 대학을 다니느라 바빴다. 엄마를 돌볼 사람은 한민수뿐이었다. 돈을 벌 사람도 한민수뿐이었다.
문제는 엄마가 센터에 머무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 사이에만 일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오가는 시간을 빼면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 점심을 거르더라도 5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시간에 50살을 훌쩍 넘긴 남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인력업체가 알선하는 다양한 일을 군말 없이 했다. 주로 하는 일은 식당 설거지였다. 엄마는 매일 아침 센터 차 앞에서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아이처럼 몇번을 뒤돌아보며 떼를 썼다. 한민수의 속은 타들어갔다. 지금 엄마를 센터 차에 태우지 않으면 하루 일당이 날아간다. 어느 날은 엄마가 집 청소를 다 하고 나가겠다며 뭉그적댔다. 아들의 급한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망스러워 눈물이 흘렀다. “도대체 왜 그래!” 한민수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한민수는 세 남매 가운데 막내다. 철없던 시절, 파출소를 들락거리며 말썽을 피웠다. 그래도 엄마는 회초리 대신 새 오리털 패딩을 내밀며 웃어주었다. 그래서일까. 말썽쟁이 막내를 품어준 엄마에 대한 한민수의 애착은 유난히 강했다. 항상 엄마 곁을 떠나지 않았다. 결혼하고도 형 대신 엄마를 모셨다. 삶의 끝까지 엄마와 작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그 다짐이 정녕 옳은가 자문했다.
엄마의 치매가 점점 심각해졌고 한민수가 화를 내는 주기는 점점 짧아졌다. 걸레와 수건을 구별하지 못하는 건 그나마 괜찮았다. 샴푸 대신 락스를 집어 들고 머리를 감으려 할 때는 큰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새벽에 자다 깨보니 떡을 하겠다며 온갖 그릇을 꺼내 쌀을 담아놨다. 거실 바닥은 독에서 옮기다 흘린 쌀알로 가득했다. 한민수는 난장판이 된 거실과 쌀이 담긴 그릇 사진을 찍어 카카오스토리에 올렸다. “엄마가 밤새 안 주무신 거 같다. 떡을 하신다고…. 나중에 보면 눈물이 날 것 같다.” 제목은 ‘어머님의 떡시루’. 마음속에서 마지막이 오고 있음을 짐작했던 걸까. 그 글을 올린 지 한달 뒤인 2017년 3월, 한민수는 결국 엄마를 요양원에 모셨다. 치매 발병 5년 만이었다.
첫번째 요양원은 친한 형님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집 근처라 자주 가기도 좋았다. 요양원에 있는 다른 노인들을 보니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나만 불효자는 아니구나.’ 그래도 마음에 빚은 남아 매일 엄마를 보러 갔다. 엄마는 헤어질 때마다 마치 그날이 요양원에 온 첫날인 듯 말했다. “민수야, 집에 가자. 민수야, 집에 같이 가.” 엄마의 말은 족쇄보다 무겁게 발목을 옥죄었다. 한민수는 매일 쇠사슬을 끊어내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엄마는 요양원에 적응하지 못했다. 조용한 산을 좋아하던 엄마에게 낯선 노인들의 소음과 갖가지 소동 속의 삶은 고통이었다. 요양원장과의 친분도 되레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런저런 처우를 바꿔달라고 말하고 싶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원장 형님이 “요양보호사가 말도 없이 그만둬버렸다”며 욕설을 퍼부었다. ‘형이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그랬겠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한민수씨 어머니가 지냈던 세번째 요양원에서 지난해 제공된 급식 사진. 부족한 급식에 노인들은 늘 배를 곯아야 했다.
요양원 입소 3개월 만에 한민수는 엄마를 집에 모시고 왔다. 그리고 3개월을 버텨봤지만 결국 일을 하며 엄마를 모시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으로 되돌아갔다. 낮에는 어떻게 버텨볼 만했다. 하지만 한민수는 자신이 잠든 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없었다. 그 불안감이 일상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다른 곳은 낫지 않을까?’ 한민수는 2017년 9월 두번째 요양원의 문을 두드렸다. 상황은 더 나빠졌다. 엄마의 몸에 멍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한민수는 7개월 만인 2018년 4월 엄마를 다시 집에 데려왔다.
“민수야, 너무 좋다. 우리 집이 너무 좋다. 우리 같이 살자.” 옆에 누운 엄마가 쉴 새 없이 뽀뽀했다. 하지만 날이 밝으면 엄마는 세번째 요양원에 입소한다. 이미 10명 미만의 노인이 지내는 작은 요양원(노인공동생활가정)을 예약해뒀다. 7개월 만에 집에 돌아온 엄마는 이제 계속 집에서 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민수는 어느 때보다 신난 엄마에게 내일 밤은 함께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자신이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엄마를 끌어안았다. 굽은 등이 평온한 심장박동을 따라 들썩거렸다. ‘다 때려치우고 엄마를 집에 데려올까?’ ‘좀 더 참고 희생하면 되지 않을까?’ 이미 결론지었던 의문을 또 품었다. 그러나 어떤 다짐도 현실 앞에서 무력하다는 사실을 한민수는 잘 알고 있었다. 엄마가 다치기라도 하면 또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요양원에 엄마를 보내는 건 정말 엄마를 위해서일까, 나를 위해서일까.’ 그 질문에 끝내 답하지 못한 한민수는 밤을 꼬박 새웠다.
“신랑, 내가 아픈 데도 없는데 이제 집에 가야지.” 세번째 요양원에서 엄마는 한민수를 가끔 ‘신랑’이라고 불렀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는 20년이 넘었다. 엄마의 상태는 더 나빠졌고 그럴수록 집 타령은 늘었다. “여기는 답답하고 신랑이랑 살 수가 없다.” 집에 가야 할 이유를 댈 때만은 엄마는 온 힘을 다해 정신을 부여잡고 있는 듯했다. 그때마다 한민수는 설명했다. “엄마, 집에 있는 냄비가 하나도 성한 게 없어. 엄마가 집에 있으면 불낼 수도 있어. 집에는 턱도 많아서 위험한데 여기는 턱도 없잖아. 엄마, 내가 계속 엄마에게 화내면 어떡할래.”
그렇게 몇개월이 지나고 엄마의 간절한 부탁을 이기지 못한 한민수가 엄마를 하루 집에 모셔왔다. 아이처럼 좋아하던 엄마는 그날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때는 그것이 엄마가 오랜만에 집에 온 게 좋아서라고만 생각했다. 그날 밤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보호자님, 취침약이 빠졌네요….” 엄마를 돌보던 요양원 직원의 전화였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 그때 그 직원이 취침약을 주지 않은 게 실수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요양원장이 그렇게 지시한 것이었다. 당시 전화를 걸어왔던 직원 ㄱ씨는 요양원을 그만둔 뒤 한민수에게 “원장이 ‘보호자도 고생을 해봐야 우리 고마운 줄 안다’며 부모를 집에 데리고 가는 경우 취침약을 빼고 약을 주라고 지시했다”고 고백했다. 그날 ㄱ씨가 전화를 걸었던 건 원장의 지시를 이행해놓고 내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민수는 그 하나의 사건으로 세번째 요양원에 대한 모든 신뢰를 잃었다.
ㄱ씨는 <한겨레>와 만나 세번째 요양원의 문제를 낱낱이 털어놨다. “어르신 옷을 벗겨놨는데 똥을 쌌다고 ‘귓구멍을 못으로 박아야 귓구멍이 뚫려서 말을 듣겠냐’는 식으로 말하더라고요.” ㄱ씨는 요양보호사들이 어르신들을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여러차례 목격했다. 말을 듣지 않는 노인을 제압하려 요양보호사가 노인 위로 올라가 몸을 누르는 경우도 봤다. 그날 노인의 손에는 멍이 남았다. 치매 노인을 돌보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ㄱ씨는 적어도 폭력을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참다못해 이 사실을 요양원장에게 말했다. 요양원장은 외면했다.
식사 문제도 심각했다. “요양원 직원들이 짜장면을 시켜 먹으면 주방 선생님이 단무지를 남기라고 해요. 왜 그러냐고 물으면 반찬 만들어야 한대요. 남은 단무지 9개를 채 썰어서 노인 한 사람당 다섯 조각씩 줍니다.” 9명의 일주일치 반찬 재료가 시금치 한단, 콩나물 한봉지, 오이 두개인 이 요양원에서 노인들은 늘 배를 곯았다. 간식비를 따로 받으면서도 간식은 요양원장이 따로 운영하는 어린이집에서 요구르트 한두개씩을 빼와 보충했다. 당연히 충분했을 리 없다.
ㄱ씨와 같은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했던 ㄴ씨의 말도 다르지 않았다. “보호자가 사 온 두유를 간식으로 줘요. 그것도 하나를 두세번에 나눠서. 배고픈 어르신들은 그 두유 한모금을 못 먹을까 내내 그것만 쳐다봐요.”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먹이는 것은 다반사였다. 요양원장이 어디선가 얻어 온 도넛을 냉동했다가 간식으로 내놓기도 했다. 노인들이 그런 음식을 먹고 설사하면 요양원장은 “약 먹여요” 한마디만 하고 말았다.
고발해도 소용이 없었다. 한번은 구청에 부실급식 신고가 들어갔다. 신고에도 단속이 늦어지자 ㄱ씨는 요양원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사용하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구청에 보냈다. 하지만 구청은 점검을 나간다는 사실을 미리 요양원장에게 알렸다. 그날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으로 가득 찬 냉장고는 말끔히 치워졌다. 구청 직원은 “누가 자기를 음해한 것”이라는 요양원장의 말을 너무 쉽게 믿었다. 한민수는 식단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진즉에 알았다. 엄마가 비쩍 말라갔기 때문이다. 식단표에 적힌 반찬은 늘 화려했다. 하지만 ‘잡곡밥/강낭콩죽, 호박두부된장국, 돈육두루치기, 어묵볶음, 짠무무침, 포기김치’라는 식단이 적힌 날, 엄마의 식판에는 단무지 한쪽에 건더기 없는 맹탕국이 나왔다. 참다못해 직원에게 한마디 하자,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한민수가 목격한 맹탕국의 실체는 참담했다. 한 보호자가 사 온 갈비탕 1인분에 물을 넣어 18인분을 만든 뒤 노인 9명에게 두끼를 먹였다. 시간이 흐른 뒤 그 사실을 알게 된 한민수는 분노의 눈물만 흘렸다.
엄마는 맹물에 만 밥과 먹다 남긴 단무지 반찬도 그저 “맛있다”고 했다. 집에 가자는 이야기는 그렇게나 하면서 밥이 맛없다, 배가 고프다는 그 말을 엄마는 하지 않았다. 아들이 걱정할까 우려해서였다. 식단이 부실하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한민수는 식사시간에 맞춰 엄마를 보러 갔다. 매번 식판을 사진으로 찍었다. 며칠 지나 요양원장이 한민수를 불러 그 이유를 물었다. “쓸데가 있다”고만 답했다. 요양원장은 자신이 급식 사진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 뒤부터 식사 때마다 꼬박꼬박 사진이 왔다. 조금 나아졌나 했지만, 엄마가 외출해서 한민수의 곁에 있는 날에도 어김없이 ‘엄마가 드시고 있는 음식’이라며 멀쩡해 보이는 음식이 담긴 식판을 찍어 보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한민수는 지난해 9월23일 세번째 요양원에서 엄마를 모시고 나왔다.
네번째 요양원도 마음에 차진 않았다. 어느 날 엄마를 요양원에서 데리고 나와 병원에 가는 길이었다. 차 안에서 똥냄새가 진동했다. 요양원에선 아무리 외출 시간을 미리 알려줘도, 똥을 많이 싸도, 기저귀는 정해진 시간에만 갈았다. 규정이 그렇다고 했다. 학대하거나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음식을 급식으로 내놓는 것에 견주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요양원을 세번이나 옮긴 한민수는 이제 포기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엄마가 네번째 요양원에서 지낸 지 다섯달이 되던 지난 2월26일이었다. 그날 한민수는 여느 날처럼 퇴근한 뒤 엄마를 보러 갔다. 한시간 정도 있다가 일어나려는데 엄마가 한민수를 껴안았다. “집에 같이 가자.” 그날따라 엄마는 유독 강하게 한민수를 놔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엄마의 모습이 유난했다는 건 나중에야 깨달았을 뿐이다. 한민수는 억지로 엄마의 팔을 풀었다. “엄마가 집에 혼자 있어야 하면 내가 불안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하필 한민수는 냉정하게 굴기까지 했다.
몇시간 뒤 요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가 잠에서 깨질 않으세요. 좀 더 지켜볼까요, 아니면 119를 부를까요?” 한민수는 요양원으로 달려갔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사인은 뇌출혈. 한민수는 그렇게 엄마와 작별했다.
엄마의 장례를 마치고 얼마 뒤 누나가 한민수에게 사진 한장을 보내왔다. 한민수가 엄마에게 챙겨줬던 만화 성경책의 한 페이지였다. 누나는 한민수에게 “엄마가 거기다 뭐라고 적은 것 같다”고 말했다. 삐뚤빼뚤한 글씨를 자세히 뜯어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착한 아들, 니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
이주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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