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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만세시위에 빚졌으니 독립전쟁 길 나서리

등록 2019-04-29 08:05수정 2019-04-29 13:57

어느 만세 청년의 편지
3·1운동은 어디로 이어졌나
비밀결사·독립전쟁·임정정부
3가지 길로 면면히 이어져
2~30년대 노동·농민운동 등
일제 강점기 사회운동 젖줄
◆농사일을 하고 있는 신흥무관학교 학생들. 우당기념관 제공
◆농사일을 하고 있는 신흥무관학교 학생들. 우당기념관 제공

<편집자 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 숨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1919년 4월28일 경성/엄지원 기자】? 국망 9년 만에 ‘독립 만세’ 소리가 터져나온 지도 어느덧 두어달이 지났다. 희망으로 만개한 봄이었다. 지축을 뒤흔든 함성은 저 일제를 비롯한 이방인들이 무기력하고 나약하다고만 보았던 조선 민중들 안에 숨어 있던 용기를 각성시키고 남았다. 점화된 독립운동의 열망을 흉중에 품은 청년들의 발길은 조선 밖으로 향하고 있다. 개중 한 청년이 만주로 향하는 길에 서신을 보내왔다. 지난 육십일의 투쟁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청년의 글이 함께 되새길 만하여 옮겨 싣는다. 이하 서신 전문. [편집자주]

존형, 두달새 줄잡아 1천번의 만세시위가 조선땅 방방곡곡에서 일어났습니다. 그사이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이 피체되고 두들겨 맞고 학살당하였습니다. 살아남은 저 같은 이는 그저 그들 죽음에 빚진 죄인일 것이옵니다. 그리하여 저는 결심하였나이다. 이 숭고한 희생과 이상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전심으로 조선의 독립만을 향하여 걸어볼 참입니다. 이 서신이 형께 당도할 때쯤 저는 만주에 있을 것입니다. 목적지는 경술년 압록강을 건넌 이회영(52) 선생 가문이 세운 통화현 합니하의 신흥중학(신흥무관학교)입니다. 책상머리에 앉아 실력을 키우려던 애제는 이제 독립군이 되고자 하옵니다. 지난봄 우리 민족은 참으로 고귀하고도 순진하였습니다. 우리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에 모일 열강의 선의를 전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동리의 코흘리개들까지 윌슨이 비행기를 타고 조선을 구하러 온다는 말을 믿고 만세를 외칠 정도였지요. 그 순진무구한 기대 속에 맨손으로 만세를 외친 숱한 민초들이 선혈을 흘리며 스러졌사옵니다. ‘비폭력’이라는 만세운동의 숭고한 원칙은 이 약육강식의 비정한 현실세계에서 너무 높은 이상이 아니었을는지요. 그나마 이달 초 상해에 세워졌다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서 직접 현지의 상황을 목격한 이들의 실망감도 이만저만이 아니옵니다. 출발부터 작은 일에도 옥신각신하며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평화적 호소는 짓밟혔으므로, 이제 저와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청년들은 무력으로 나라를 되찾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데 뜻을 모으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탈출해 나오는 애국 청년들, 재만 동포 청년들, 또 과거 의병 활동에 참여했던 노년층까지 몰려들어 신흥무관학교가 개교 이래 최대의 성황을 이루고 있다’는 소식이 이를 증명할 듯하옵니다.

3·1운동은 실패했지만 성공한 혁명이었다. 총독부의 가혹한 탄압에 시위는 결국 진압되었지만, 국내에서의 비밀결사와 만주 무장투쟁, 상하이 임시정부로 그 흐름은 면면히 계승되었다. 3·1운동 당시 덕수궁 부근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는 모습. 한겨레 사진 자료
3·1운동은 실패했지만 성공한 혁명이었다. 총독부의 가혹한 탄압에 시위는 결국 진압되었지만, 국내에서의 비밀결사와 만주 무장투쟁, 상하이 임시정부로 그 흐름은 면면히 계승되었다. 3·1운동 당시 덕수궁 부근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는 모습. 한겨레 사진 자료
청년들 중에는 정규전을 치르는 부대보단 로서아(러시아) 황제를 향해 싸우는 인민들의 군대 파르티잔처럼 소규모의 비정규군을 조직함이 어떠한가 하는 이들도 더러 있는 모양입니다. 만주에 와서 만난 김약산(김원봉·21)군은 남경 금릉대학을 다니다 현재는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 중인데, 그를 비롯한 몇몇 제군을 만나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나이다. 폭탄을 제조하여 적국의 관공서를 파괴하고 유격전을 펼친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몇몇의 고민일 뿐이라지만, 저의 단견에는 그같은 전술 전략에도 공감되는 바가 있었습니다.

국내에도 그에 공명하는 움직임이 없지 않을 듯하옵니다. 경성 창신동에서 철물사업을 크게 하던 김상옥(30) 형을 기억하시지요? 사업을 하던 때에도 국산품을 장려하며 일제를 배척하였던 형이지만, 3·1운동 뒤에는 학생들과 ‘혁신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혁신공보>라는 이름의 지하신문을 찍어내고 있다고 하옵니다. 만주로 떠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형은 좀 더 급진적인 투쟁을 고민하는 듯하였습니다. 마음 맞는 동지들을 만나기에 달린 일이겠지요. 1919년 9월 노인인 강우규(64) 의사의 사이토 총독 암살 기도는 조선의 청년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김상옥은 그해 12월 암살단을 조직해 일본 고관과 친일파 숙청을 기도한다. 이후 상해로 망명해 김원봉의 의열단에 합류한다.]

일본군은 지난 25일에 조선의 만세운동은 평정됐다고 선언했다지요? 적국의 총리 하라 다카시가 “다소의 군대를 급파해 양민을 보호하게 됐다. 그 결과 다행히 다소 평온해지는 중이며 완전히 진정되는 날도 머지않았다”고 발표하였다는 말도 들었나이다. 그들은 이 봄의 만세운동을 한때의 ‘소요사태’로만 여기고 있지요. 허나 저 수원 제암리의 학살로 상징되는 잔혹한 진압으로 만세운동이 사그라지고 있다 하여 조선의 독립운동마저 진화되고 있다고 판단한다면, 이는 훗날 큰 오판으로 귀결될 것이 분명하옵니다. 만세운동을 통하여 조선인 저마다의 일본과 식민주의를 향한 투쟁이 비로소 시작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존형, 시중에는 만세운동으로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고 개탄하는 이들도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그들에게 제가 존경하는 안도산(안창호·41) 선생의 말씀을 전하고 싶사옵니다. “만세로만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만세의 힘은 심히 위대하여 안으로는 전국민을 동원하였고 밖으로는 전세계를 동원하였습니다. 이러한 평화적 전쟁에도 수십만의 생명을 희생해야 합니다. 이것도 독립전쟁이외다.” 우리는 이제 막 일본을 상대로 첫 전쟁을 치른 것이 아니겠나이까. 독립의 그날까지 굴하지 않고 계속할 전쟁을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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