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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1919 한겨레] 유관순과 동기들 “담 넘어서라도”…군중들 경성으로

등록 2019-03-01 07:39수정 2019-03-01 13:36

기미년 통신 l 거사전야
고종 인산 구경 인파 인산인해
흰치마 흰두루마기 흰물결 장관
“남편 죽인 일제 맞서 싸울 것”
국외 혁명가들 참여 못해 서운
이화학당도 시위결사대 조직

<편집자 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 숨 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고종의 대여행렬을 바라보는 경성시민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고종의 대여행렬을 바라보는 경성시민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19년 2월28일 경성/엄지원 기자】

경성은 요사이 흰 물결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3월3일로 예정된 고종황제의 인산(장례)을 구경하겠다고 밀려드는 이들이 남대문역 출구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기차표나 여관방은 매진 행렬이고 거리에서 노숙하는 이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국상에 맞추어 여자들은 흰 저고리에 흰 치마, 남자들은 백립(흰 갓)에 흰 두루마기를 입었으므로 눈길 닿는 곳 어디나 순백 일색이다. 넘치는 수요 탓에 백립을 구하지 못한 이들은 검은 갓에 흰 종이라도 대어 임시방편으로 삼고 있을 정도다.

이날은 마침 국장 예행연습이 있는 날이라 대한문에서 종로통, 동대문에 이르는 연도에 모인 군중은 십수만명을 헤아릴 듯하였다. 중앙기독교청년회(YMCA)의 윤치호(54)도 종로 사무실에 나와 가족들과 장례 예행연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현실주의자인 그는 구태의연한 인산 절차를 조소하면서도 조선민들의 열기에 다소간 놀란 표정이었다. 윤치호는 “조선인들이 참을성 많고 우둔하고 호전성이 없기 때문에 민족본능이 조금도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황제의 서거에 대한 대중들의 애도와 동경에서 일어난 조선인 유학생들의 소요(2·8독립선언) 등은 조선인들 마음속에 민족 본능이 살아있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중얼거렸다. 조선 독립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그는 이번 일요일(3월2일)부터 3일 동안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는 모든 공공집회를 취소하기로 했다. 1일에 열릴 민족적 거사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 일에 휘말리기는 싫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 경성으로 통하는 길 ‘인산 구경’을 나온 이들 가운데는 분명 거사에 참전하러 온 이들도 섞여 있었다. 경북 안동에서 막 올라온 남자현(47)은 혈혈단신이다. 을미년(1895) 의병을 일으켰던 남편 김영주가 숨진 뒤 재가도 하지 않고 혼자 꾸려온 삶이다. 지난 26일 그는 경성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다음 달 3월1일 조선 민족의 만세운동이 있을 것이니, 연희전문학교 부근 교회당에서 그날 아침 만나자.” 남자현은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24년 전 남편을 삼킨 일제에 이번에는 자신이 맞서 싸울 때라고 말이다. ♣?H5s나중에 ‘여자 안중근’이라고 불릴 정도로 치열한 남자현의 독립운동은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막 시작되고 있다.♣?]

동경에서 유학생 독립선언에 참여했던 황에스터(27)도 이날 경성에 도착했다. 그는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자신의 유학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에 돌아와 독립운동에 나서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황에스터는 자신보다 며칠 먼저 유학생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국내에 들어와 동경 독립운동 소식을 타전 중인 김마리아(27), 나혜석(23)과 함께 움직일 계획이다. 적국 일본의 수도를 경악으로 몰아넣었던 것처럼, 조선 여걸들은 조선총독부를 충격에 빠트릴 수 있을 것인가. 몰려드는 이들과 반대로 은밀히 경성을 빠져나가는 이들도 여럿이다. 이를테면 천도교 인쇄소 보성사의 사무원 인종익(48). 남대문역에 선 인종익은 품에 숨긴 종이 뭉치를 일본 관헌에게 들키지나 않을까 전전긍긍이었다. 그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61)의 지시로 선언서 2천부를 배부받아 전주로 향하는 길이다. 자신이 붙잡히면 만사가 허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열차를 기다리며 인종익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자꾸만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이번에 좌절하면 또 이 뒤를 이어 (다른 인물이) 나올 것이고, 100인을 죽이면 100인이 나올 것이다. 인심은 물이다. 한강이다. 아무리 막더라도 물은 물로서 새어 나와 흐를 것이다.”

◆ 혁명가들의 길 정작 이번 거사가 있기까지 마중물 구실을 해온 국외 혁명가들은 1일 만세시위에 참여할 수 없음이 운명의 역설이다. 경성을 넘어 평양을 건너 만주로 향하는 이는 김순애(30)다. 파리강화회의에 상해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견된 남편 김규식(38)은 지금 인도양 위에 있다. 그는 3월 중순쯤에나 파리에 도착할 것이다. 그를 떠나보낸 뒤 김순애는 고국으로 돌아와 남편의 파리행과 상해의 독립운동 소식을 이곳저곳에 전달하고 다녔다. 국내에서 시끌벅적하게 봉기해야, 파리에서 김규식의 언동에 무게감이 실릴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김순애에게 경성에서 만난 함태영(46)이 전해준 1일 독립선언식 소식은 단비와 같았다. 그도 마땅히 동참할 일이 아닌가 하였으나 이 일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함태영은 김순애를 설득하였다. “그러다 (김순애가) 잘못되면 파리에 가 있는 김규식의 사기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러면 민족의 대업 완수에 지장이 있을 것 아니겠는가.” 옳은 말이었다. 김순애는 그 길로 조선을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1919년 3월3일 국장으로 치뤄진 고종 장례식에서 상여가 지나가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19년 3월3일 국장으로 치뤄진 고종 장례식에서 상여가 지나가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김규식이 파리에 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왔던 신한청년당 총무 여운형(33)은 3·1거사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차갑고 고독한 여로에 있다. 동경과 상해, 경성을 오가며 거사를 촉진해왔던 장덕수(25)는 남산 경무총감부에 갇혀있는 신세고, 이광수(27)와 중국 <중화신보> 기자 조동호(27)가 그나마 상해 신한청년당을 지키고 있다. 동경에서 유학생 선언서를 쓰고 난 뒤 상해에 건너온 이광수는 조동호의 방에 붙어살며 외신에 독립운동 소식을 알려왔다. 경성에서 거사를 앞두고 파견되어 온 예수교(기독교) 목사 현순(39)의 방문은 이광수의 활동에 가일층 활력을 더하고 있다고 한다.

◆ 청년들이 걸어갈 길 국외 망명객들의 결기를 이어가는 것은 경성의 학생들이다. ‘조선총독부의 관심이 온통 국장에 쏠려 있는 지금은 정말이지 하늘이 준 기회가 아닌가.’ 세브란스병원의 침상에 누운 강기덕(33·보성법률상업학교)은 생각했다. 이번 거사를 앞두고 김원벽(25·연희전문학교)·한위건(23·경성의학전문학교)과 함께 학생계를 대표하고 있는 그는 사흘 전인 25일 병원에 입원했다. 일제의 주목을 피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운동가들이 병문안을 구실로 찾아오면 병실에서 회의를 이어갔다. 허나 이제 몸을 움직일 때다.

이날 저녁 병원을 나온 강기덕은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서 수천부를 받아 챙겨 인력거에 실었다. 정동예배당에서 김원벽을 비롯한 각 학교 대표 40여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언서를 나눠 가진 학생들은 이 자리에서 “1일 집회 때 폭력 행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경찰의 주목을 받아 체포될 위험이 있는 사람들은 집회에 참여하지 말자”고 합의했다. 그들에겐 학생들만의 2차 독립운동이 예비되어 있는 까닭이다. ‘3월5일 아침 9시 남대문역’. 국장이 끝나고 나면 대규모 귀향 인파가 남대문역에 몰릴 것을 고려한 전술이다. 학생들은 “내일 파고다(탑골) 공원에서 다시 만나자”고 인사를 나누며 흩어졌다. 1일 대규모 만세시위가 있을 거란 소식은 이날 오전부터 일반 학생들 사이에도 암암리에 전파되었다. 교실에서, 식당에서, 하숙집에서, 소식 빠른 학생들은 거사에 대해 목소리 낮춰 이야기하기에 바빴다. 대표적인 예수교 학교인 이화학당 여학생들에게도 이 소식은 파다했다. 이문회(이화문학회) 회원인 유관순(17)은 서명학(14) 등 동기들과 시위결사대를 조직해 시위에 참가하기로 맹세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은 담을 넘어서라도 우리도 독립운동에 나서자.” ♣?H5s유관순을 비롯한 소녀들은 이튿날인 3월1일 외국인 교사들이 외출을 저지하자 문자 그대로 담을 넘어 대한문 앞 만세군중에 합류한다.♣?

△참고문헌

‘3·1절을 앞두고 떠오르는 피의 기록’(강기덕 인터뷰), <경향신문> 1950년 2월26일치

이상국, <나는 조선의 총구다>(세창미디어·2012)

김상태 옮김, <윤치호 일기>(역사비평사·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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