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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1919 한겨레] 여학생도 농민도 노동자도 “죽음을 기약하고 일어나라”

등록 2019-03-01 07:35수정 2019-03-01 09:24

한겨레가 뽑은 민중대표 48인
유관순 감방엔 아기도 수감…모두가 엄마처럼 함께 돌보고
만세시위 나선 기생들에겐 일 경찰도 “화류계 여자 아닌 투사”
순사의 장도에 왼팔 잃은 여학생은 피묻은 태극기로 “만세”를 외쳤다

쏟아진 격문과 지하신문엔 학생들이 제작·배포에 몸바쳤고
농민은 장날 큰 물결을 이끌었다
총독 경고를 사람들에게 읽어주던 동네이장은 분노해 만세를 주도했다
한겨레가 뽑은 민중대표 48인.
한겨레가 뽑은 민중대표 48인.

<편집자 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 숨 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이 땅의 모든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내 정치경력은 3·1운동으로 시작되었다. 대중운동의 힘이 내 존재를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미국인 기자 님 웨일스를 통해 세상에 털어놓은 회고담 <아리랑>에서 혁명가 김산은 밝혔다. 정확히 오늘로부터 100년 전 조선에서 벌어진 기미년 3월1일의 싸움이 당대 청년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집약적으로 드러내어 주는 말이다.

그날, 식민지 백성들은 새로운 근대주체로 다시 태어났다. 글을 배운 학생들은 격문을 쏟아냈고, 글을 못 배운 이들은 다른 이에게 물어서라도 ‘민족자결주의’가 무엇인지 알아냈다. 땅을 빼앗긴 농부들은 분노했고, 착취당한 노동자들은 파업했으며 상인들은 상점문을 걸어 잠갔다. 가부장제 아래 가장 약한 존재였던 여학생과 기생들이 남자보다 앞장서서 용기를 냈다. 얼굴 없던 이들이 얼굴을 드러냈고, 말 없던 이들이 말을 쏟아냈다. 수직적으로 짓누르는 식민지 권력에 맞서 조선의 2백만 민중은 수평적으로 연대하며 운동을 발전시켜 갔다. 3·1운동의 흐름 안에서 본격화된 학생운동, 여성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사회운동은 이후 100년 동안 대한민국을 진보시킨 원동력이 됐다.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는 33인이지만 계획에 가담한 이들까지 확대하여 민족대표 48인이라고 통칭한다. <한겨레>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1919년 사회지도층이 아님에도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이들을 톺아 ‘민중대표 48인’을 선정했다. 자유와 평화를 희구했던 평범한 영웅들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재판기록 등 3·1운동에 참여했음을 확인할 공식 기록이 있는 이들 가운데 사진이 남아있는 이들을 주요 대상으로 검토했다. 여기 소개된 48인의 민중대표는 그나마 얼굴과 이름이라도 알릴 수 있던 이들이다. 기미년 3월 조선 역사에는 이름도 얼굴도 없이 잊힌 독립운동가들이 수백만이었다.

■ 만삭의 운동가, 기생, 여학생까지…전면에 나선 ‘여자들’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은 충남 천안에서 시위를 주도한 유관순(당시 나이 17살), 황해도 개성에서 시위를 주도한 전도사 어윤희(38)와 신관빈(34) 등 여성 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방에서 갓 태어난 아기가 함께 지냈던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경기도 파주에서 3월10일과 26일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임명애(33)가 임신한 몸으로 수감되었던 까닭이다. 농사를 짓는 임명애와 남편 염규호(39)는 격문을 만들어 등사해 배포하며 수백명 군중을 이끌었다. 임명애는 징역 1년6개월, 염규호는 1년형을 받았다. 그해 10월 임명애는 보석으로 잠시 풀려나와 아기를 낳고 11월 아기와 함께 재수감됐다. 서대문형무소의 혹독한 겨울밤을 산모와 아기가 견딜 수 있었던 건 유관순을 비롯한 여성 동지들이 돌봐주었기 때문이다. 임명애의 회고에 따르면 추운 감방에서 잘 마르지 않고 얼기만 하는 기저귀를 유관순이 몸에다 감아 체온으로 녹여주었다고 한다.

수원의 기생 김향화(23)도 8호 감방의 원년멤버다. 3월29일 자혜병원으로 정기 건강진단을 받으러 가던 길에 김향화를 비롯한 수원기생조합 소속 기생 33명은 만세시위를 벌였다. 당시 조선 기생들은 일본 경찰조차 “화류계 여자라기보다는 독립투사라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표현할 만큼 절개가 높아 ‘사상기생’이라고 불렸다. 수원뿐 아니라 진주, 통영, 해주에서 기생들은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세브란스병원 견습 간호사 노순경(17)은 동기인 김효순(17)·이신도(17)와 종묘 앞에서 만세운동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붉은 글씨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만들어 시위를 주도했다가 8호 감방에 끌려왔다. 간호사들도 독립운동에 나선 여성들의 한 축이었다. 5일 경성의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집행유예를 받은 원산 구세병원 간호사 탁명숙(26)은 그해 9월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폭탄을 투척하고 도피한 강우규 의사의 도피처를 주선하기도 했다. 결혼 뒤 제주도에 정착한 탁명숙은 제주 4·3사건 뒤 부모 없는 아이가 도처에 생겨나자 제주보육원을 설립해 1972년 별세할 때까지 헌신한 인물이기도 하다.

3·1운동을 통해 역사의 전면에 처음 나선 ‘여학생’들은 결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부산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일신여학교, 개성 시위를 주도한 호수돈여학교, 광주 시위를 주도한 수피아여학교 등 여학생들은 3·1운동기에 헌신하며 다른 운동주체들을 이끌었다. 여학생 시절부터 민족운동에 열심이었던 박현숙(23)과 박애순(23)은 1919년 각각 평양과 광주에서 만세운동이 처음 논의될 때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수피아여학교 학생 윤형숙(19)은 3월10일 광주 시위대의 선봉에 섰다가 일본 순사의 장도에 왼팔을 잃고도 피 묻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더 크게 외쳤다는 ‘설화적’ 에피소드의 주인공이다. 그는 이후 고문으로 오른쪽 눈마저 실명해 평생 고통받으면서도 문맹퇴치운동에 헌신했다.

가장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인 김마리아(28)의 삶도 어쩌면 1919년에 결정됐다. 김마리아는 일본의 조선인 유학생으로서 2·8독립선언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선언서를 국내로 몰래 들여와 3·1운동을 촉진했다. 3·1운동이 시작되자 도쿄의 여학생들과 서울의 여학생들을 한데 묶어 조직했고 그 때문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뒤 모진 고문을 당했다. 4개월 만에 출소한 김마리아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애국부인회 조직에 적극 나섰다가 재수감됐다. 그는 이때 얻은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삶과 죽음을 오갔고 개인으로서의 삶은 포기해야 했다. 국외에서 3·1운동을 촉발시키고, 운동이 벌어지자 국내에 들어와 이를 추동하고, 운동이 지나간 뒤에는 그 가치를 이어 독립운동을 지속했다는 점에서 김마리아는 남녀를 넘어 3·1운동의 정신에 가장 부합한 인물이라고 할 만하다.

3·1운동 1주년을 맞은 1920년 3월1일엔 배화여학당 학생들이 학교 뒤 언덕과 운동장에서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는데, 소은명(14)·소은숙(16) 등 어린 학생 24명이 모두 구속되었다. 일제가 조선의 ‘여학생’들을 얼마나 두려워하게 됐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 열혈청년들의 격문 3·1운동은 지도부가 없는 운동이었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유통해 기틀을 마련한 ‘민족대표’들은 있었지만 그들이 첫날 연행된 뒤 시위군중 하나하나가 운동을 만들어갔다. 쏟아져 나온 격문과 지하신문들은 군중들이 스스로 학습하며 운동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1919년 3~7월 사이에 발간된 국내외 지하신문만 60종을 넘길 정도다. 가장 대표적인 <조선독립신문>은 3월1일부터 천도교 쪽에서 발간했는데, 발간 주체가 체포되면 다른 사람이 발간을 이어갔다. 경성서적조합 서기 장종건(24)은 이종일(61) 등 천도교 인사들이 붙잡혀가자 3호부터 이 일을 맡아 하다 체포됐다.

학생들은 격문 제작의 주된 참여층이었다. 경성고보 학생 박노영(19) 등은 “동포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분기하라”는 취지의 격문을 만들어 800매를 배포해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다. 경성공전 학생 양재순(21)과 직물업에 종사하는 김호준(20)도 합심해 “제군의 심령에 있는 철함 대포로써 하면 천하의 무엇인들 이를 부숴버리지 못하겠느냐”는 격문을 등사·배포해 붙잡혔다. 배재고보 학생 장용하(21)와 이춘봉(19)도 “조선독립은 확실하므로 이때 우리 동포는 죽음을 기하고 분기하라”는 격문을 서울 시내에 수십매 뿌렸다. 중앙학교 학생인 유연화(20)도 “이 기회에 조선을 일본통치 하에서 떠나 완전한 독립국이 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격문을 집집마다 배포했다.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는 이들을 대상으로 협박문을 보내는 이들도 많았다. 쌀집에서 일하는 청년 이두현(17)은 “동·서빙고리의 각 상점은 문을 닫고 이민(동네 사람) 전부가 조선독립만세를 높이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취지의 통고문을 동네 사람들에게 보내 시위 동참을 촉구했다. 인천 객줏집에서 사환으로 일하던 임갑득(16)도 “인천에 있는 상업가 여러분이 철시하지 않으면 인천시가는 초토화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며 호기롭게 상인들의 철시를 촉구했다가 붙잡혔다.

격문보다 친절하게 만세운동 참여를 독려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경기도 광주의 농부 이시종(19)은 문자를 잘 모르는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조선독립신문>을 읽어주며 “오늘까지는 면사무소에서 일본일을 하고 있었으나 조선이 독립하면 부역·세금 등이 필요 없게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가 잘 알지 못하는 글자는 또 다른 농부들이 곁에서 알려주며 함께 읽어나갔다. 시흥에 살던 서당 생도 권희(19) 역시 기존의 국한문 혼용 독립선언서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직접 통고문을 만들어 동네 사람들이 회람할 수 있게 마을 어귀에 놓아뒀다. 어려운 현안이 생겼을 때 누리꾼들이 이해를 돕는 게시물을 공유하는 것과 닮아 있다. 3·1운동으로 붙잡혀온 시위군중들이 신문 과정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보면 운동 지도층이 아니라도 많은 이들이 ‘파리강화회의’를 비롯한 국제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는데, 이처럼 함께 학습하고 깨우치며 운동했던 결과일 것이다.

학생은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노동자들은 동맹파업
사회변혁 꿈꾼 청년들을 통해
조선인 심정을 이해한 외국인은
일제 학살만행을 세계에 알리고
학생운동을 돕거나 무료변론 했다
“3·1 대중운동의 힘이 내 존재를 뿌리부터 뒤흔들어놓았다”
혁명가 김산의 말처럼
당시 학생 여성 농민 노동운동은 대한민국을 진보시킨 원동력이 됐다

■ 일신의 영달보다 민족을 생각한 공복 대부분의 관리들은 일제에 부역하길 택했지만 갈림길에서 민족을 택한 이들도 있었다. 덕수궁파출소의 순사보였던 정호석(33)은 3월5일 아침 경찰서장에게 “아이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휴가를 얻었다. 정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손가락을 깨물어 광목에 피로 태극기를 그리고, ‘대한국 독립만세’라고 적어 깃발을 만들었다. 그리곤 딸이 다니는 마포 흥영여학교에 찾아가 딸과 딸의 친구들, 교사들을 이끌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신문에서 이번 (파리)강화회의에서 약소국을 독립시킨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조선도 독립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했다”고 정호석은 검찰 신문에서 말했다.

몇몇 마을의 구장(이장)들은 만세운동을 진두지휘했다. 경기도 양주 연곡리 구장 안종규(30)는 그의 형 안종태(33)와 함께 1천여명을 이끄는 대형시위를 벌였다. 양주 평내리 구장 이승익(44)은 구장인 탓에 “쓸데없는 유언비어에 열중하지 말라”는 하세가와 총독의 유고를 동네사람들에게 읽어줘야 했는데, 이를 읽어주다가 되레 분노한 군중들과 만세시위를 벌였다. 일본인 헌병 주재소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는 등 어느 동네보다 뜨거웠던 경기도 수원 장안면의 경우도 석포리 구장인 차병한(35)이 이웃들과 논의해 주도한 것이었다.

■ 만세운동의 주인공, 농민 만세운동의 큰 물결을 이끌어간 이들은 역시 농민이었다. 조선총독부 자료를 보면 3·1운동 피검자 1만9525명 중 직업별로는 농업이 55.3%로 가장 많다. 강원도 화천에서는 마을 유지인 64살의 농부 김창의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기를 세우고 시위를 벌였고 제주 조천리에서는 김시은(29) 등 농민들이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벌였다. 평북 안주의 농민 박의송(33)도 동네 사람들과 시위를 벌였는데 그는 실형을 선고받자 “이 좋은 기회에 자유 독립의 희망에 대해서 세계 공법에 의해서 동정을 표시하는 것이 하등의 죄 될 것이 아니므로 무죄 백방하길 바란다”고 상고했다. 경북 안동의 농부 조수인(38)도 동네 사람들과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시위를 주도했다. 경기도 강화의 유봉진(32)은 농민이 아니지만 대다수가 농민이었던 지역 시위를 이끌어 징역 2년형을 받았고, 전북 익산의 교사 출신 문용기(41)는 일제의 무차별 발포로 사망자가 속출한 4월4일 장날 시위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다 헌병의 장검에 태극기를 들고 있던 두 팔을 모두 잃고 끝내 숨졌다.

농촌 지역의 3·1운동 중에는 한때 의병으로 활동하다 의병대가 일제에 의해 ‘박멸’되다시피 한 뒤 은거하던 이들이 앞장서는 경우도 있다. 강원도 김화의 객줏집 주인 김연태(40)는 구한말 의병 출신인데, 동네 사람들과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이 지역의 시위를 이끌었다.

■ 조직된 노동운동 서울의 학생들은 노동자 계층과의 연대를 통해서 운동의 외연을 확대할 수 있다고 봤다. 조선약학교 학생인 김공우(17)는 휘문고보 학생인 정지현(21)으로부터 “서울에서 학생이 주동하여 조선독립운동을 개시하였으나 힘이 미약하여 이 기회에 노동자계급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우니 ‘노동공보’ 인쇄물을 각 곳 노동자에게 배부해 이들에게 독립운동을 권유하라”는 요청을 받고 잡화상 배희두(16)와 함께 노동회보를 배포했다. 아울러 3월22일에는 봉래동 공터에서 노동자의 독립운동 참가를 촉구하는 노동자대회를 열었다. 노동자 엄창근(38)과 직공 임춘식(18)도 이 대회에 참석해 독립만세를 외쳐 모두 1~2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시위보다 동맹파업을 통해 독립 의지를 나타내는 게 효과적이라고 본 것 같다. 3·1운동을 전후해 일제에 저항하는 조직적인 파업 양상은 뚜렷해진다. 8일 용산 인쇄공 200명이 파업한 것을 시작으로 동아연초회사, 경성철도국, 서울 시내 전차 종업원들이 잇따라 파업에 나섰다. 3월20일엔 충남 직산금광 노동자가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나섰고 22일엔 서울지역의 일반 잡역 노동자 300여명이 파업했다. 당시 시위에 나섰던 용산기관차 화부 견습공 차금봉(21)이 식민지 노동문제에 깊이 관심을 가지며 1920년 조선노동문제연구회 발기인으로 참가하고 나중에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가 되는 과정을 보면, 3·1운동이 사회 변혁을 꿈꾸는 청년 운동가들에게 미친 영향을 짐작할 만하다.

■ 조선인의 ‘자유’에 공명한 외국인들 평화의 정신을 담은 3·1운동은 ‘조선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조선인보다 더 깊이 조선인의 심정을 이해한 외국인들도 있었다. 세브란스 의전의 프랭크 스코필드(30·캐나다) 박사, 한국명 ‘석호필’은 3·1운동 당시 수원 제암리 학살만행을 전세계에 알렸다. 미국인 선교사 조지 섀넌 맥큔(47), 한국명 ‘윤산온’은 3·1운동 당시 기독교계 학생들의 운동을 독려한 것은 물론, 학생들을 숨겨주어 일본의 눈엣가시였다. 3·1운동의 직접 관련자는 아니지만 일본의 후세 다쓰지(39) 변호사는 2·8독립선언 가담 학생들의 무료 변론에 헌신적으로 나섰다는 점에서 ‘대표자’라 할 만하다. 세 사람은 모두 한국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았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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