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신한촌 독립문 터에서 만세시위 1주년 행사가 열리는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
“노령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있는 조선 동포들은 근자 신한촌 동구에 큰 붉은 문을 나무로 만들어 세우고 그 문 위에 ‘삼월 일일 조선독립기념’이라 하고 새기고, 그 아래에도 삼십여자의 문구를 조각하였다더라.”
1923년 8월16일자 <조선일보> 기사 ‘해항 신한촌에 큰 붉은 문’이 묘사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독립문의 모습이다. 서울에서 직선거리로 750㎞ 떨어진 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100년 전 한인들이 ‘조선 독립’을 외쳤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해 연해주 일대에서 100년 전 거주한 한인은 10만∼20만명 규모로 알려진다. 그중에서도 항일운동의 ‘본산’이었던 신한촌은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에서 중앙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5㎞가량 이동하면 나오는 하바롭스크 거리와 아무르 거리 일대에 있었다. 1919년 3월17일 연해주에서 가장 큰 규모의 만세시위가 벌어졌고, 그로부터 1년 뒤 빨간 독립문을 세웠다고 한다. <한겨레>가 지난 18일 현장을 찾아가 보니, 지금은 오래된 아파트 단지를 가로지르는 구불구불한 길가에 나무 한 그루(하바롭스크 거리 5번지)만이 서 있다.
신한촌 독립문이 있던 장소인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거리 5번지. 지금은 오래된 아파트 단지로 변해 있다. 최하얀 기자
신한촌은 단순한 한인 집단 거주지가 아니라 교육부, 심판부, 경찰부, 노동부, 위생부, 구제부 등 정교한 체계를 둔 자치행정구역이기도 했다. 당시 교육부는 한글로 교육하는 ‘한민학교’와 러시아어로 교육하는 ‘교당학교’를 관할했으며, 기독교 교회가 운영하는 삼일여학교를 후원했다. 한민회 외에도 대한부인회, 노인회, 청년회 등 세대별·성별 조직들이 활발히 활동했다. 1917년 7월 창간돼 주 1회 발행된 <한인신보> 등 여러 신문이 국내외 소식을 전하고 여론 수렴의 기능을 한 것도 잘 알려져 있다. 이런 활동 뒤에는 최재형, 이상설, 이동휘, 문창범, 홍범도 등 굵직굵직한 독립운동 대표자들이 있었다.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로 해체
‘2A 서울스카야’ 등 곳곳에 흔적
역사박물관 재개관 앞둔 최재형 집
‘노비 출신 임시정부 재무장관’
민중이 주인 되는 변화상 보여줘
고려인 커뮤니티·한인 노력으로
‘비주류’ 연해주 독립운동사 명맥
안타깝게도 한민학교(하바롭스크 거리 7번지 일대로 추정), 권업회(1911년 창립한 항일독립운동기관, 하바롭스크 거리 7∼9번지), 이동휘 집터(노령지역 사회주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하바롭스크 거리 17·20번지) 등은 상점이나 빈터, 아파트 등으로 변해 있었다. 1937년 스탈린의 극동 고려인 강제이주로 신한촌이 폐허가 된 탓이다. 그러나 시야를 연해주 전체로 넓혀 보면, 한인 거주나 항일운동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신한촌이었던 아무르 거리 북단에는 ‘2A 서울스카야 거리’라는 주소판이 달린 집이 남아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00㎞ 거리에 있는 우수리스크의 고려인문화센터 건물 옆에는 홍범도, 안중근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독립기념관이 운영하는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누리집에 담긴 연해주 사적지만 해도 모두 31건이다.
한인들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처음 집단 거주지를 이뤘던 개척리 터. 현재 명칭은 ‘포그라니치나야’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민족학교인 계동학교, 항일언론기관 해조신문사, 대동공보사 등이 있었다. 그러나 1911년 러시아 당국이 콜레라 근절을 명분으로 한인 촌락을 강제로 철거하고, 러시아 기병단의 병영지로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한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서북쪽 변두리(지금의 신한촌)로 거주 지역을 옮겨야 했다. 최하얀 기자
특히 연해주 지역 한인사회에서 막강한 지도력을 행사했던 최재형이 1920년 4월 참변(극동지역 주둔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우수리스크 등 한인 거주 지역을 습격해 집단 학살과 가옥 방화 등을 저지른 사건으로 최재형도 당시 사살됐다) 전까지 살았던 고택이 최근 단장을 마치고 재개관을 앞두고 있다. 위치는 우수리스크의 볼로다르스키 거리 38번지다. ‘한-러 수교 20주년’이던 2010년만 해도 ‘최재형의 집’이란 건물 외벽 동판만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내부가 또 하나의 역사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최재형이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를 지원한 발자취, 노령에 세워진 최초의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가 한글·한문·러시아어 3개 본으로 만들었던 독립선언서, 당시 발간된 신문과 주요 독립운동가들이 남긴 서류·편지 등이 전시돼 있다. 재개관식 날짜는 현지 고려인 단체인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와 한국의 국가보훈처 간 최종 협의만 남겨두고 있다. 박환 수원대 교수는 “최재형은 노비와 기생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러시아에선 재력가가 되었고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에서 지금으로 치면 장관인 재무총장에 선임됐다“며 “그의 삶 자체가 왕의 나라에서 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으로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재개관을 앞두고 있는 러시아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고택. 러시아 연해주 지역 고려인 단체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가 고택을 매입했으며 독립기념관이 전시물을 기획하고 박환 수원대 교수가 감수했다. 최하얀 기자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사는 국내에서 그동안 ‘비주류’로 다뤄져 왔다. 그런데도 각종 유적지와 기념비 등이 몇이나마 남아 있는 것은,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 등 현지 고려인 커뮤니티와 한인들의 꾸준한 관심과 노력 덕분이다. 자치회 관계자는 “올해 9월에는 의병장 유인석과 한인사회당 지도자이자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울 예정”이라고 밝혔다.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총영사관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오는 3월16일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글·사진 최하얀 기자, <연해주뉴스>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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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언론진흥재단 지원으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유학생들이 만드는 <연해주뉴스> 기자단과 함께 취재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