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경성방직 공장 모습. 연도 미상. 서울시시사편찬위원회
물가 상승과 더불어 쌀값 폭등으로 가장 경제적 곤경에 처한 이들은 도시 노동자다. 쌀값이 크게 오른 재작년 후반기 이래, 알량하게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조차 이들의 경제적 형편을 다룬 기사를 빈번하게 싣고 있는 것은, 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도 엄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위 생존투쟁이라 할 노동자들의 동맹파업 또는 임금투쟁이 급증하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노동자들의 저항은 수치로도 확인할 수 있다. 3년 전인 병진년(1916) 동맹파업은 8건에 조선인 참가 인원이 362명이었는데, 이듬해에는 같은 8건에 1128명, 지난해에 이르면 50건에 4443명으로 급증했다.
사례를 짚어보면, 재작년 8월28일 평양 동아연초회사 본공장의 조선인 노동자 29명이 동맹파업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각종 물가가 등귀한 시점에서 종래 임금으로 생활할 수 없다 하며 종전보다 시간당 4전을 올려달라고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파업에 들어갔다. 지난해 5월1일에는 남만주 철도(만철) 경성관리국 용산공장에 근무하는 노동자 1천여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5월1일부터 근무시간이 한시간 연장되는 데 상응해 임금을 올리라고 요구한 것이 해결되지 않은 데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 파업은 노동자들에게 어떤 소득도 없이 공장 측의 회유와 설득에 의해 이틀 후 종료되었다.
노동자들의 처절한 생존권 투쟁은 경성전기회사의 차장·운전수들에게서도 터져 나왔다. 지난해 8월12일 오전 11시, 차장·운전수 교대시각에 새로 교대할 60여명의 차장·운전수가 전차에 올라 교대를 하지 않고 동대문 안 전차과의 승무원 집합소에 모여 ‘시간당 임금을 10전에서 20전으로 할 것, 차장·운전수 견습 수당은 매일 50전으로 할 것, 한달에 네번 쉬는 날을 줄 것’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일본인이 사주인 회사는 임금 인상 요구를 일축하면서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혔다. “너희들의 생활상 곤란을 피하게 하기 위하여 이제 들어올 안남미를 많이 사다가 너희에게 싸게 팔겠다. 즉 한되에 이십전이라 하면 차장과 운전수의 가족 수효를 헤아려 얼마든지 먹고 살도록 반값이나 혹은 시가보다 매우 저렴하게 공급하겠다.”
임금 인상은커녕 고압적인 어투에 “외국 쌀이나 먹으라”는 회사 입장은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심한 모욕감으로 다가왔다. 노동자들은 즉각 파업에 돌입했고 회사는 사무원, 직공, 차장 감독, 인부 등의 대체인력으로 전차 운행을 시작하려 하였다. 이를 보고 격분한 노동자들이 전차를 가로막고 운전을 중지하려 하자 회사는 종로경찰서에 진압을 요청하였다. 헌병 경찰의 제지 끝에 전차 운행이 시작되었지만 3분지 1의 운행만 가능한 상황이었다. 동일 저녁 6시 회사는 1인당 한달에 2원 이상 4원 이내로 수당을 지급하는 등의 조건을 마지못해 수락하였다.
연이은 동맹파업을 두고 민족진영에서는 쌀값 폭등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총궐기가 임박했다는 징후로 해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