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숨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경술년(1910), 조선을 강제로 집어삼킨 일본이 천인공노할 폭력성으로 우리 민족을 억압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소위 ‘무단통치’라고 하는 조선총독부 지배방식을 상징하는 제도가 있으니, 바로 태형이다. 태형은 곤장으로 볼기를 때려 불구를 만들거나 망신을 주는 야만적 형벌인데 오직 ‘민도가 낮은 조선인’만 대상이 된다. 자칭 ‘문명인’인 일본인은 맞을 수 없다. 식민지 백성의 치욕스러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일곱해 전인 임자년(1912) 총독부가 조선태형령을 제정해, 없어졌던 태형을 부활한 이래 조선인들은 걸핏하면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 즉결처분으로 치욕를 당한다. 지난해 1월과 2월에는 “인왕산 국유산림에 들어가서 감시원 몰래 솔나무가지 한 무더기를 도벌하다가 들켜 태형”을 당하거나 “경성 경복궁 신무문 밖 보안림에 들어가서 솔잎새(소나무 잎사귀) 한 움큼을 절취하다가 발각되어 태형”에 처해지는 일이 있었다. 이들처럼 뒷산에서 나무를 해 오다 삼림령 위반으로 태형에 처해진 게 갑인년(1914)부터 정사년(1917)까지 1만393명에 이른다. 지난해에는 전체 태형 처분자 3만8683명 가운데 3991명(10.3%)이 삼림령 위반으로 곤장을 맞았다. 나라를 빼앗은 일본이 자기들 마음대로 산림을 국유화한 뒤 ‘한 움큼의 솔잎새’를 훔쳤다고 조선 사람을 되레 곤장으로 때리니 적반하장도 유분수. 큰 도둑놈이 주인을 때리는 형국이 아니고 무엇이냐.
태형의 단골손님은 도벌이 아닌 도박이다. 도박은 1910년대 내내 하나의 사안으로는 전체 즉결사건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중 80% 안팎의 인원(13만187명)이 노름으로 볼기를 맞았다.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을 지배하겠다는 도박을 벌인 일본이 동리 야바위꾼들의 볼기를 때리고 앉았으니 소가 웃을 일이로다.
하세가와 요시미치(69) 총독을 위시한 총독부의 살뜰한 폭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있으리오. 질서나 위생에 관계된 일, 일탈, 풍기문란도 태형으로 엄히 다스리느라 순사 나리 어깨도 고단하시었다. 임자년에 “과일장사 하는 리완우는 익지 아니한 감을 팔다가 순사에게 발각되어 태 15개에 처해”졌고 이듬해 “인천부 내면 우각동 3통 6호에 살던 김원택은 거주지 근처가 청결치 못하여 위생상의 방해가 적지 아니함으로 태 20개에 처해졌다.”
“(태형 제도에 의해) 일본 순사들에게는 그들이 원한다면 재판을 거치지 않고서도 한국인을 구타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해마다 수만명에게 태형을 가했으며 그것이 얼마나 가혹했던지, 남는 것이라고는 줄을 이은 불구자와 시체뿐이었다.” 일본이 그렇게 흠모해 마지않는 대영국의 언론인 매켄지가 태형 제도를 두고 한 말이다. [마포 오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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